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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반도사관 모순…중국 하남성 근거 모용외 침략

by 고구리역사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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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반도사관 모순…중국 하남성 근거 모용외 침략

스카이데일리, 서천태왕 23년(292) 임자 2월, 태왕이 춘추 53세에 갑자기 붕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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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태왕 23년(292) 임자 2월, 태왕이 춘추 53세에 갑자기 붕어하자 장자 치갈(雉葛)이 즉위하니 이가 봉상왕(烽上王)이다. 휘는 상부(相夫) 또는 삽실루(歃矢婁)이고, 모친은 우(于)씨이다. 호색한이었으며 성품이 교만하고 시기심도 많고 매우 잔인했기에 원래 서천태왕은 치갈에게 보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서천태왕이 갑자기 붕어하자 우후가 거짓조서로써 자기 아들 치갈을 보위에 올린 것이었다.
자결하는 안국군 달가
봉상왕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12년 전에 고구리를 침략해왔던 숙신을 정벌해 구국의 영웅이 된 숙부 안국군(安國君)에게서 병권을 빼앗아 자기 형제들에게 넘겨주니 나라사람들이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양맥·숙신의 난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며 한숨을 지었다고 한다.
봉상왕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정적을 제거한 것이었다. 봉상왕이 내린 조서에는 “안국군 달가(達賈)는 본바탕이 다른 족속이고 품계도 낮았는데 감히 병권을 훔쳐서 누차 위태로웠기에, 짐이 몸소 그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 집안을 몰수한다”라고 했다. 본 바탕이 다른 족속이라는 말은 달가가 신라 김옥모 태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달가의 측근들이 조카 치갈을 제거하라고 권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측근들이 마지막으로 다시금 어머니의 나라 신라로 피할 것을 권해도 “나는 선제를 따라 죽을 것이야”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자결하고 말았다. 폭군 봉상왕은 안국군의 처 음(陰)씨를 간신 원항(猿項)에게 하사했다. 이어 봉상왕은 백부인 문부(門夫)를 태보(영의정), 상루(尙婁)를 좌보(좌의정), 연방(椽方)을 우보(우의정)로 삼고, 연안(椽眼)씨를 황후로 삼았다.
 ▲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환관 조치겸의 자결 장면 <사진=필자제공/드라마 캡처>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외는 고주몽의 혈통
봉상왕 2년 계축(293) 8월, 선비족 모용외(慕容廆)가 환성(桓城)에서 쳐들어와 변방을 노략질하자, 봉상왕은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길을 나서서 곡림(鵠林)에 다다랐다. 모용외가 이를 알아채고는 봉상왕을 쫓아와 곧 다다를 참이었는데, 신성태수 고노자(高奴子)가 적을 맞이해 들이치니 모용외의 군사가 크게 패해 물러났다. 이를 곡림대전이라 한다. 고노자는 본디 고씨의 가신으로 공을 세웠음에 대형(大兄)으로 작위를 더해주고 곡림 땅을 하사했다.
곡림은 찾을 수 없고, 모용외의 첫 도읍이었던 환성은 <한서> 권8에서의 ‘좌풍익군(左馮翊郡=河上郡)’에 대한 설명에서 “景帝二年置 武城莽曰桓城 (경제 2년에 설치했고, 무성현을 왕망이 환성현으로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무성을 다시 검색하면 아래 4가지가 나오는데, 여러 가지를 검토해볼 때 ②의 산동성 가상현 또는 ③의 하남성 남양현일 수도 있다고 추측된다.
武城 : ①春秋鲁邑,在今山东费县西南,后亦谓之南武城,《论语雍也》子游为武城宰,《左传昭公二十三年》邾人城翼还,将自离姑,武城人塞其前,《又哀公八年》“吴伐我,道险,从武城,”程启生云,此乃费县之武城。(산동성 비현)
② 春秋鲁地,在今山东嘉祥县南四十五里南武山下,《春秋襄公十九年》城武城,《杜注》“太山南武城,”在今山东费县西南九十里,程启生云,费县乃鲁与邾吴所接界,此宜在嘉祥县界,《清一统志》鲁有二武城,东武城即今武城县,南武城在今费县,曾子居武城,子游为武城宰,当在今费县,通志亦击之费,而充州府志,又称嘉祥县南四十五里有南武山,山南有曾子墓,山南三里许有南武城,盖因明成化三年山守臣上言,嘉祥南武山西南有渔者误陷入一穴中,得悬棺,其前有石碣镌曾参之墓,诏封树丘陵,始有嘉祥县之南武城。(산동성 가상현)
③ 在河南南阳县北,一名武延城,春秋时申地,后属楚,《左传僖公六年》蔡穆侯将许僖公见楚子于武城,《杜注》楚地,在南阳宛县北。(하남성 남양현 북쪽)
④ 在湖北黄陂县东南,亦曰武口城,梁太清二年,湘东王绎发兵援台城,军于郢州之武城,即此。(호북성 황피현)
이듬해 모용외는 도읍을 대극성(大棘城)으로 옮긴다. 대극성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다. 대극성의 전욱고양의 근거지였으므로 아래 ②의 하남성 상구시 석성현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황하남부 하남성에 있던 모용외가 고구리로 쳐들어왔다는 의미는 고구리가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즉 현재의 역사이론처럼 고구리를 한반도에 놓고서는 전혀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大棘城(대극성): ①在辽宁义县西北。晋初慕容鬼以大棘城为帝颛顼之墟,由秆河徒避之。
(진 초 모용괴가 대극성을 전욱의 옛터로 했다. 간하를 따라 무리가 도피했다) ※ 요녕성 의현 서북은 역사왜곡된 부분이다.
② 在河南柘城县西北。《左传》:宣公二年,宋华元及郑公子归生战于大棘。《史记梁孝王世家》:吴楚先击梁棘壁。《注》:宋华元战于大棘,盖即棘壁是也。
(하남성 석성현 서북. 송 화원과 정공자가 태어나고 돌아와 싸운 곳이다.)
 ▲ 요택에 살던 모용선비의 진출 추정도. 고구리는 대극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미지=필자제공>
참고로 <고구리사초·략>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모용외는 선비족 자몽왕의 후예로 자몽(紫蒙) 땅 구려성(句麗城=高勾麗縣)에서 흥기해 우문(宇文)씨와 서로 다투고는 환성(桓城)으로 남하했다가,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금 대극(大棘)으로 내려간 것이다. 어미 乙씨가 추모(고주몽)의 아들인 두지(豆智)의 후손인지라, 모용외는 서몽대왕(西蒙大王)을 자칭하고는 동명(東明=주몽)의 적손이라면서 불측한 마음을 남몰래 키우고 있었다.
선비족의 원래 거주 지역은 하남성 북부를 흐르는 심수와 황하 사이의 200리 늪지대인 요택(遼澤)이었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에 화살을 맞고 퇴각하면서 퇴로가 없어 갇혔다는 그 유명한 요택이다. 이 부근에 선비족의 뿌리가 되는 원류들이 살았고, 이들이 사방으로 진출지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 즉 심수 동쪽에 있는 신향현 부근에 공자의 노(魯)나라와 강태공의 제(齊)나라가 있었기에 위와 같은 중국자료가 나온 것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모용씨가 우문씨에게 밀려 남하해 환성으로 갔고, 다시 남하해 대극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위 기록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 당태종이 갇혔던 200리 요택은 원래 선비족이 살던 지역. 위휘는 제·노 지역 <이미지=필자제공>

돌고의 죽음과 아들 을불(미천대제)의 도피
이듬해 9월 봉상왕은 아우 돌고(咄固)가 딴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려 죽이자,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탈출해 도망친다. 돌고는 지난해 모용회가 고구리를 침략해 곡림(鵠林)에서 전투를 벌일 때 군대를 이끌고 찾아와 싸워 큰 공을 세웠기에 여러 신하들이 돌고의 작위를 올려주고 식읍도 봉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자 간신 원항이 나서면서 “돌고는 달가의 무리이니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왕의 조서를 기다리지도 않고 스스로 찾아온 것은 제위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음이고, 때문에 거짓으로 모용외의 토벌을 칭한 것이었지 실제로는 은밀히 반역을 기도했던 것이옵니다”라고 아뢰니 봉상왕은 “그럽시다”라고 하며 역시 강력한 정적인 돌고를 죽인 것이다. 돌고가 죽자 원항은 돌고의 모친 고씨를 강제로 거두어 첩으로 삼았다.
 ▲ 드라마 ‘조광조’에서 사약을 받는 장면 <자료사진=필자제공/드라마 캡처>
돌고가 죽임을 당할 때 을불은 좌보 상루의 집에 있었고, 상루가 집안사람 둘을 시켜 을불을 보호하게 했다. 을불은 수실촌에 있는 음모의 집으로 달아나 숨어서 품팔이를 했는데, 음모가 을불을 심하게 부려먹어 지극히 고생스러웠다. 개구리가 울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니 을불은 밤새도록 기와조작을 던져 울지 못하게 했고, 밤낮으로 땔감나무를 해오라 하니 잠시도 쉬지 못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소금을 팔면서 압록 땅 사수촌(思收村)에 사는 사람의 집에 의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