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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려 국운 중흥기 중국 지명에서 증거된 제국

by 고구리역사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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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려 국운 중흥기 중국 지명에서 증거된 제국

스카이데일리, <삼국사기>에는 고구리 중흥기의 기반을 닦은 위대한 미천태왕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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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고구리 중흥기의 기반을 닦은 위대한 미천태왕 을불의 어릴 적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고, 성년이 되어 백부 봉상왕에게 쫓기면서 야인생활을 하던 시절의 일화만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미천태왕의 위대한 탄생에서부터 어릴 적 이야기가 아래와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천태왕 9년(278) 무술 봄 정월, 태왕이 후・비들과 함께 밤에 연회를 하던 중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나면서 작은 개 모양의 불빛이 돌고(咄固)태자의 침전으로 날아들었다.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 우선이 이를 보고는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으로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천랑성은 오리온자리 좌측에 있는 큰개자리에 있는 쌍성(雙星)으로 밝은 별은 태양보다 23배 가량 더 밝고 크기도 더 크며 태양에서 8.6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다. 큰개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Sirius'라고 하는데, ‘반짝이는’ 또는 ‘이글거리는 듯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해 10월 을씨가 을불(乙弗)을 낳으니 오색구름이 궁궐을 감싸고 향기가 그윽했다. 을불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성한 우량아로 태어났으며, 기이한 영웅호걸처럼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한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위대한 대고구리의 미래가 아주 밝다는 말인 것이다.
 
을불이 3살 때 숙신이 쳐들어와 고구리의 변방을 노략질하자 서천태왕은 신라 김옥모 태후의 소생인 달가(達賈)로 하여금 이를 정벌하게 한다. 달가는 기병을 이용해 숙신을 단번에 격파하고는 이를 복속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나라를 편안하게 했다는 의미의 안국군(安國君)으로 봉해지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맡게 되고 겸하여 숙신·양맥을 다스리게 된다.
 
 ▲ 오리온자리 좌측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천랑성이다 <사진=필자제공>

 
달가는 양맥으로 떠날 때 아우 돌고(咄固)를 함께 데리고 갔다. 돌고가 어느 황후의 소생인지 기록은 없으나, 달가와 둘도 없이 가까웠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김옥모의 소생으로 추정된다. 서천태왕은 돌고의 아들 을불을 품에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이들을 전송했다. 당시 을불은 불과 3살이었는데도 달가 백부가 필히 크게 이길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 이유로 첫 싸움에서 얻은 땅 알하(戞河)를 을불읍으로 삼고 돌고가 직접 다스리게 했다.
 
12년(281)에는 4살짜리 을불을 태자로 삼고, 17년(286)에는 을불의 위대한 탄생을 예견했던 태사 우선을 스승으로 삼아 효경을 가르쳤고, 을불은 나이 아홉 살에 능히 말 타고 활쏘기(騎射)까지 했다. 하루는 태왕에게 “무(武)만을 좋아하고 예(禮)를 모르면 꼭 일우 백부 같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예를 익히고 효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니, 서천태왕은 크게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 무용총 수렵도처럼 말 타고 활을 쏘려면 등자(발받침)가 있어야 한다 <사진=필자제공>

 
꿈틀거리는 모용(慕容)씨
 
아시아대륙의 절대지존인 고구리에게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당시 한족(漢族)의 나라 서진(西晉)은 실제로는 자기네가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남의 나라 땅을 자기네 행정구역으로 만들고 그 지역의 관리까지 임명한다. 물론 기록으로만 그랬을 뿐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북5도회를 만들어 그곳의 도지사와 행정관리를 임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황하 서안평 일대 <이미지=필자제공>

<고구리사초·략>에 “서천태왕 5년(274) 갑오 가을 8월, 서진이 유주(幽州)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는 범양(范陽)・상곡(上谷)・북평(北平)과 요서(遼西)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昌黎)・요동(遼東)・대방(大邦)・낙랑(樂浪)・현토(玄免)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晉)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위로 설치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평주를 검색하면 “진나라 때 유주에서 갈라지고 창려에 치소가 있었고, 전연 때는 양평에, 후연 초기에는 용성 후기에는 평곽에, 전진 때는 화룡에, 후위 때는 비여에, 수·당나라 때는 북평군이라 말했으며, 원나라 때는 영평부로 바꾸고 노룡에 치소를 두었다 (晋分幽州置 治昌黎, 前燕置 治襄平, 后燕置 初治龙城 后治平郭, 前秦置 治和龙, 后魏置 治肥如, 隋置唐因之亦曰北平郡, 元改为兴平府 治卢龙)”라고 나타난다.
 
유주, 양평, 비여, 북평군, 노룡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주는 유주의 요서군 일대 즉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북평군은 요서군에서 떨어져 나간 행정구역으로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이고, 양평은 요서군의 동쪽인 요동군에 속한 현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노룡) 。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당시 고구리와 서진의 중간 지역에 살고 있던 모용씨 선비족은 강력한 추장 모용외(慕容廆)가 나타나면서 서서히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다. 유목과 농경을 하던 선비족은 족장의 성을 부족명으로 하는 관습이 있어 모용씨라 칭했다. 모용외는 세력이 커지자 나중에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했고, 4세기 초 서진에서 일어난 ‘영가의 난’을 피해 투항해온 한족들을 적극 받아들여 관리로 임용하고 중국풍의 예절제도를 채택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중국백과사전에는 “동진 태흥 3년(321) 동진정부가 그를 유주·평주의 도독, 동이제군사, 차기장군, 평주목으로 명했고, 요동군공 봉함을 받아들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힘없는 동진이 강력한 모용외를 제후로 봉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306년 서진이 멸망하자, 왕족 사마예가 건업(建業)으로 피해와 지방호족의 힘을 빌려 건국한 나라가 동진이다. 이전 오나라 도읍이었던 건업은 양자강 하류 남경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지금의 호북성 악주이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동진 지도에 표시된 건업 <이미지=필자제공>

 
이어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에 이르러 연왕(燕王)이라 자칭하고, 수도를 용성(龍城)으로 하여 전연(前燕)을 건국하고는 아버지 모용외를 고조 선무제(高祖 宣武帝)로 추존한다. 모용황은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해 황제로까지 즉위했으며, 전연이 멸망한 뒤 모용씨는 후연과 남연을 건국했다가 5세기 초 같은 선비족인 북위(北魏)에게 병합되고 만다.
 
서천태왕 16년(285) 비리(卑離)의 왕 의려가 모용외에게 패해 자살하자, 그 권속들이 을불의 아버지인 돌고(咄固)에게로 도망쳐오자 이들에게 양을 나누어주어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었다. 이렇듯 본시 고구리의 속국이었던 비리가 나중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광개토호태왕이 영락 5년(395)에 친정해 정벌했다는 내용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그 시절 모용강이 피살되자, 모용외는 모용섭귀의 아들 계(繼)로 하여금 그 무리를 이끌게 했다. 섭귀와 외는 같은 어미의 남편이고, 계와 외는 같은 어미에서 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즉 모용섭귀의 아들 모용외는 자신의 어미를 처로 삼았다는 말인 것이다. 고구리 중천태왕과 명림전태후도 같은 경우이다.
 
서천태왕은 18년(287) 정미 정월에 돌고를 양맥(梁貉) 교위로 삼았다. 비리의 의라가 서진과 함께 모용외를 정벌해 장수 손정을 참수하고는 옛 땅을 회복했으며, 돌고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맥(貉)의 병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양맥은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예는 지명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사는 족속이 바로 맥족인 것이다. 
 
 ▲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우리는 대륙의 역사강역을 잃게 된다 <이미지=필자제공>

 
23년(292) 임자 2월, 태왕이 춘추 53세에 갑자기 붕어해 서천릉에 장사지냈다. 이어 장자 치갈(雉葛)이 즉위하니 이가 봉상왕(烽上王)이다. 휘는 상부(相夫) 또는 삽실루(歃矢婁)이고, 모친은 우(于)이다. 성품호색한이었으며 성품이 교만하고 시기심도 많고 매우 잔인했기에 원래 서천태왕은 치갈에게 보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서천태왕이 갑자기 붕어하자 우후가 거짓조서로써 자기 아들 치갈을 보위에 올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