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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려판 장희빈, 중천왕 사냥터 ‘도읍지 방증’

by 고구리역사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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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려판 장희빈, 중천왕 사냥터 ‘도읍지 방증’

스카이데일리, 위나라 모(관)구검의 난리를 슬기롭게 극복한 동천태왕이 사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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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모(관)구검의 난리를 슬기롭게 극복한 동천태왕이 사냥터에서 갑자기 깊은 병이 들자 도성으로 급히 돌아와 태자를 불러 신검(神鐱)을 넘겨주고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248년 붕어하자 장자 연불(然弗)이 25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중천태왕(中川太王)이다.
모후는 명림전(明臨鳣) 태후로 태보 명림식부(息夫)의 딸이며 갑진년(224) 2월 꿈에 산궁마을 골짜기에 불이 퍼지는 것을 보고서 연불을 낳았고, 성장하니 외모가 뛰어나게 시원스러웠고 차분하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지략이 있어 무리들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중천왕은 연씨(椽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하며, <고구리사초·략>에서는 “모후를 천궁황태후(天宮皇太后)로 높이고 기타 후궁들은 대행시절과 같게 했다. 요(要)공주를 상황후로, 전(蚕)씨를 중황후로, 연엽(椽葉)을 하황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리는 황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선황의 황후와 후궁들을 형사취수제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형사취수(兄死娶嫂)제는 형·부친이 죽은 뒤에 동생·아들이 형수·부친의 첩을 받아들여 함께 사는 제도이다.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받은 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는 제도이다. 또한 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형수를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모(관)구검의 난리 후 동천태왕은 서안평에 서둘러 진공했음을 후회하며 일찍이 태자에게 “위나라와는 싸우지 말고 내정을 잘 살필 것이며, 신라와 백제는 복속하라”고 타이른 까닭에 용병에 매우 신중했고, 다만 사냥과 여색을 즐겼다고 한다. 효심이 깊은 중천태왕은 선황(동천태왕)의 유지를 저버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 일명 ‘중천태왕 즉위교서 벽비’, 그 내용으로 보아 즉위교서로 단정하기 어렵다. <사진=필자제공>
중천태왕 원년(248) 11월 아우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은 선황이 독살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자 관군들이 이를 격파했다. 태왕은 아우들을 해치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으나, 그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어 끝내 구하지 못했다. 태왕은 아우들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고, 그들의 처자들을 면죄해주었다.
자신의 후궁을 海에 던져 죽인 중천태왕
고구리 중천태왕 때 조선왕조 숙종의 장희빈처럼 심하게 투기하는 후궁이 있어 태왕이 그녀를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연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삼국사기>에 “4년 신미(251)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는 이상한 기록이 있다. 중천태왕은 왜 자신의 후궁(소후)을 서해에 던져버렸으며, 과연 이 서해는 지금의 황해(黃海) 바다를 말하는 것일까?
관나는 얼굴이 곱고 맑았으며 머리카락의 길이가 9자나 되었고, 모(관)구검의 난리 내내 동천태왕을 따르다가 옹구(壅丘)에서 승은을 입었다. 관나는 연엽과의 인연으로 태왕을 모시게 되었고, 연엽 또한 관나로 인해 총애를 받게 되자 서로 의자매를 맺었고 두 사람 모두 소후에 봉해졌다.
중천태왕 즉위 후 연엽이 약우태자의 어미라 황후가 되자, 연황후는 의자매를 맺은 관나를 깔보게 되었다. 화가 잔뜩 난 관나는 밤마다 태왕에게 옹구에서 승은을 입던 일들을 상세히 일러바쳤다. 관나는 태왕의 승은을 독차지하면서도 연황후와는 무당을 불러 저주해 서로를 해치려하기에, 태왕은 곤란해져 마음이 다른 소후에게로 돌아서게 되었다.
 ▲ 장희빈이 무당을 불러 저주하는 장면 <사진=드라마 캡처>
 
결국 태왕이 연황후를 천하게 여겨 발길이 뜸해졌고, 연황후 역시 약이 올라 태왕과의 잠자리에서 “관나의 머리카락은 지아비들께 좋지 않습니다. 관나가 선황에게 승은을 입을 때, 그 긴 머리채가 구렁이로 변해 선황을 여러 겹으로 휘감았기에 병이 드신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나 태왕은 그 말을 투기로 보아 믿지를 않았다.
또한 “서쪽에 있는 위나라가 머리카락이 긴 여자를 천금을 주고 구한다고 하니, 관나를 바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왕이 웃으며 “내가 듣기에는 위나라가 살찌고 푸짐한 여자를 찾는다고 하니, 당장이라도 택일을 해 그대를 보내야겠소. 위주(魏主)의 승은을 입거든 짐의 은혜를 잊지 마시오”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연황후가 깜짝 놀라며 태왕의 품에 안기며 소리 내어 울면서 “신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약우는 어쩌시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태왕이 측은함에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르길 “옹구에서의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니었소. 다만 좀 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소”라고 충고했다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연왕후가 참소하기를 소중화에 입각해 “서위에서 장발미인을 천금을 주고 사간다 하옵니다. 옛날 우리 선왕이 중국에 예를 다하지 못한 탓으로 병란을 입어 밖으로 달아나 거의 사직을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왕께서 그들의 원하는 바에 순종해 사신을 보내 장발미인을 진상하면, 그들은 반드시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다시는 침범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이때부터 연황후는 감히 관나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관나는 이에 힘입어 태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더니만 연황후의 지위까지 빼앗으려고 거짓으로 잉태한 척하며 교태를 부리며 “황후가 신첩을 ‘촌년’이라고 험담했고, 폐하께서 기구(箕丘)로 사냥가신 틈을 타 신첩을 죽이려고 하니 폐하를 따라가고 싶습니다”라고 참소했다.
중천태왕이 사냥간 기구(箕丘)는 어디인가?
중천태왕이 사냥을 나간 기구(箕丘)는 필시 고구리의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기(箕)라는 지명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번역) 기 : 춘추 시기 진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태곡현 동쪽 35리에 있다. <춘추 희공 33년> 진나라 사람이 북적에게 기에서 패했다. <두주> 태원 양읍현 남쪽에 기성이 있다. <춘추지리고실> 북적이 진나라를 정벌하는 그해, 서하에 있던 백적이 진과 대치했으니 기 땅은 당연히 황하 가까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산서성 포현이며, 한나라의 하동군 포자현 땅이고, 동북쪽에 기성이 있다. 수나라 초에 현의 치소가 이전해 포현으로 바뀌었고, 당나라 때 이동해 기성이 현 동북쪽에 있다. 진인이 북적에게 패한 기와 북적이 멀리 간 태곡의 기는 별개이나 같은 땅이다.
(원문) 箕 : 春秋晋地,在今山西太谷县东三十五里,《春秋僖公三十三年》晋人败狄于箕,《杜注》太原阳邑县南有箕城,《春秋地理考实》按此年狄伐晋,白狄也,白狄在西河,渡河而代晋,箕地当近河,成十三年传云,秦入我河县,焚我箕郜,是近河有箕,今山西蒲县,本汉河东郡蒲子县地,东北有箕城,隋初移县治此,后改蒲县,唐移今治而箕城在县东北,晋人败狄于箕,当在此,若太谷之箕,去白狄远,别是一地。
기구는 기산과 같을 가능성도 있다. 기산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그 중 그럴듯한 곳은 다음과 같다.
(번역) 기산 : <수경주> 기수는 제현 기산에서 나와 서남류해 술현으로 흘러간다.
1) 하남성 등봉현 동남, 요임금 때 소부 허유가 기산에 은둔했고, 뒤에 백익이 기산의 남쪽에서 우의 아들에게 은둔했다. 모두 일명 악령이다.
2 )산서성 평육현 동북 90리, 산 모양이 기와 같고 역시 허유의 은신처로 전해진다.
3) 산서성 요현 동쪽으로 당나라 때 기주라 했다. 그로 인해 기산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원문) 箕山 : 《水经注》箕水出诸县箕山,西南流注沭。
1) 在河南登封县东南,尧时巢父许由隐于箕山,后伯益避禹之子于箕山之阴,皆此,一名鄂岭。
2) 在山西平陆县东北九十里,山形如箕,亦传为许由隐处。
3) 在山西辽县东,唐改箕州,因此山为名。
 ▲ 기구(箕丘)는 도성인 평양성 부근에 있어야 한다. 검은색은 기산에 대한 설명 <이미지=필자제공>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중천태왕이 사냥을 간 기구(箕丘)는 위 기(箕) 땅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한 산서성 포현(蒲縣)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구검의 침공 때 당시 도성인 환도성이 심하게 파괴되어 재사용하기 어려워 동천태왕 21년(247) 평양성을 쌓고는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기 때문이다. 도읍 환도성(안시)과 평양성에 대해서는 아래 칼럼 참조 바랍니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539)  
<이후 관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