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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봉상왕 시대 태백산, 중국 산서성 남부 ‘태산’

by 고구리역사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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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봉상왕 시대 태백산, 중국 산서성 남부 ‘태산’

스카이데일리, 봉상왕 8년(299) 기미 9월, 귀신이 봉산에서 곡을 하고 객성(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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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8년(299) 기미 9월, 귀신이 봉산에서 곡을 하고 객성(떠돌이별)이 달을 범했다. 이때 봉상왕이 초씨와 함께 봉산행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태사 연봉이 “객성이 달을 범하면 외적들이 후비와 내통한다는 증좌입니다”라고 아뢰었더니, 초씨가 화를 내며 “연봉이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방자하게도 이런 망언을 하는 것입니다”고 아뢰자 봉상왕은 연봉을 귀양 보낸다.
 
그때, 서부대사자 우린이 “방부가 을불의 편에 서서 반역했다”고 고변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연봉이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연봉이 “주상이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스럽고, 충신들에게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소이다. 관망하다가 정변이 나면 그에 내응함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하자 우린도 발걸음을 돌려 고변하지 않았다. 민심은 물론 신하들의 마음도 하나둘 봉상왕을 떠나고 있었다.
 
고대 태산은 산서성 남부 곽태산
 
“9년 경신(300) 2월부터 7월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하늘마저 봉상왕을 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월, 기림이 비열홀(比列忽)에 이르렀고 우수주(牛首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니, 낙랑과 대방이 기림을 찾아와 회동하며 의논하기를 “고구리가 망하고 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위 기록으로 볼 때 우수주는 낙랑·대방과 상당히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우수는 로수가 시작되는 부산현 북쪽 일대로 산서성 임분시 북쪽으로 나타난다. 즉 우수가 유주에 속한 요동군 지역이기 때문에, 역시 같은 유주에 속한 낙랑과 대방에서 찾아간 것이다.  
 ▲ 산서성 남부 태악(곽태산)이 고대 태산. 역사왜곡을 위해 산동성으로 이동된 태산. <이미지=필자제공> 
 
로수 : 산서성 임분현 북쪽에 있다. 근원은 부산현 북흑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휼수에 합쳐져 임분현 북쪽에서 분하로 들어간다. 일명 흑수이다. <산해경>에 “우수의 산에서 로수가 나와 휼수까지 서쪽으로 흐른다.
 
(원문) 涝水 : 在山西临汾县北,源出浮山县北黑山,西流合潏水,至临汾县北入于汾,一名黑水,《山海经》 牛首之山,涝水出焉,西流至于潏水。
 
따라서 기림이 제사를 지낸 태백산은 지금의 곽태산(霍泰山)인 것이다. 원래 태산(泰山)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시 남쪽에 있는 지금의 태산이 아니라 산서성 남부에 있는 곽태산이었다. 과연 그런지 여부는 아래 근거로 입증된다. 즉 태산도 역사왜곡을 위해 산서성에서 산동성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성기전>에 따르면 치우천왕이 회·대(淮岱)사이에 웅거했고, <단군세기> 22세 색불루 단군조에 “은나라를 추격해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 땅으로 옮겨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회(淮)는 하남성 남부에 있는 회수 일대를 말하는 것이고, 대(岱)는 대종(岱宗) 즉 태산을 말하는 것으로 산동성에 있는 태산이 아니라 산서성 임분시 동쪽에 있는 태악 즉 곽태산(霍太山)을 말하는 것이다. 아래 <주례직방>에 ‘其山镇曰xx’이라는 같은 문구가 있어 泰山 = 太岳(=곽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문) 泰山: 是为东,亦曰岱宗 《书舜典》东巡狩至于岱宗 《周礼职方》河东曰充州,其山镇曰岱山,(태산은 대종이라고도 한다. <수순전>에 동쪽 순방을 대종까지 했다. <주례직방> 하동(산서성 남부)을 충주라 했고, 기산진을 대산이라고 했다.)
 
(번역) 태악: 지금의 산서성 곽산. <사기정의>지리지에 하동 췌현 동쪽에 곽태산이 있다. <주례직방>에 기주 기산진을 곽산이라 했는데 태악이다. <장정석 상서지리지 주해> 태악 일명 곽태산은 산서 평양부(임분) 곽주 동쪽 30리에 있고, 산 둘레는 이백여리이다. 남으로 악양현과 월성현과 접하고, 북으로 영석현, 동으로 심원현 경계와 접한다.
 
(원문) 太岳: 即今山西之霍山 《正义》地理志,河东彘县东有霍太山,周礼职方氏,冀州,其山镇曰霍山,即此太岳是也,《蒋廷锡尚书地理今释》太岳,一名霍太山,今为中镇,在山西平阳府霍州东三十里,山周二百余里,南接岳阳赵城二县,北接灵石县,东接沁源县界,)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봉상왕
 
 ▲ 백성들이 궁궐을 중건하는 모습 <이미지=필자제공/에듀넷>
 
 
가을 8월, 나라 안에서는 남녀 15살 이상이 궁을 짓는 부역에 끌려왔다가 먹을 것이 모자라 유랑하기에, 창조리가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는 “천재가 연속해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계곡과 구렁텅이를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이러한 사정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웃에는 강력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의 피폐한 기회를 이용해 침범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시옵소서”고 고했다.
 
그러자 봉상왕은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떠받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중함을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나를 비방해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하는 것 같구려”라고 말하자, 창조리는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仁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忠이 아닙니다. 신이 국상에 있는 이상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봉상왕이 웃으며 “경이 백성들을 위해 죽겠다 이거요?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잘못을 고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어전에서 물러나와 중신들과 의논해 을불을 맞아들여 제위에 올리고, 봉상왕을 폐하여 가두었다. 봉상왕은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아 스스로 목매어 죽고, 두 아들 또한 뒤따라 죽어 봉산원에 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