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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숙종 때 궁녀로 입궁한 옥정(장희빈)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어 왕자 균(경종)을 낳자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당시 인현왕후에게는 소생이 없었기에, 숙종은 무리하게 젖먹이 왕자를 세자로 책봉한다. 노론이 이에 극렬 반대하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불리는 옥사가 일어나고, 인현왕후마저 폐서인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자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숙종은 이내 이를 후회해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킨다. 이른바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남인세력이 몰락하고 소론이 대거 기용된다. 복위된 인현왕후는 35세를 일기로 승하하는데, 직전에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사(賜死) 당하고 만다.
위와 같은 장희빈과 비슷한 사건이 고구리 중천태왕 때 일어난 관나부인 사건이다. 의자매까지 맺은 연황후와 소후(후궁) 관나가 무당을 불러 저주하며 서로를 해치려하고 음해하고 투기를 심하게 하자 처신이 곤란해진 태왕은 다른 소후에게로 마음이 돌아서게 된다. 관나는 연황후가 계속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참소하며 태왕에게 사냥터에 따라가겠다고 주청한다.
태왕은 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인지라 끝내 다른 후궁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궁궐로 돌아왔더니, 관나가 가죽자루를 가지고 나와 엉엉 울면서 태왕을 맞이하며 “황후가 이것에다 신첩을 넣어서 해(海)에 던지려 했습니다. 신첩을 살리시어 친정으로 돌아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 죽임을 거부하는 장희빈에게 억지로 사약을 먹이는 드라마 장면 <사진=드라마 캡처>
태왕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는 화를 내며 “네가 海에 빠지고 싶어 하니, 海가 네 집일 것이야”라 이르고는 사람을 시켜 관나를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하(西河)에 던져버리라고 명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21세로 요절하니 나라사람들이 이를 가엽게 여겨 장발곡(長髮曲)을 지었다고 한다. 관나는 16살 때인 246년 위나라 무(관)구검의 난리 때 동천태왕의 승은을 입었다.
그러나 중천태왕은 실제로는 관나를 죽이지 않았다.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투기의 화신인 관나를 서하에 던져버리라고 겉으로는 명령하고는 따로 사람을 시켜 그녀의 목숨을 살려준다. 중천태왕은 붕어하기 직전 예전에 지극히도 총애했던 관나를 다시 불러 함께 지내다가 곧 병이 들어 46세의 나이로 붕어한다.
관나를 던져 죽인 서하(西河)는 어디인가
중천태왕이 관나부인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던져버리라고 명한 서해(西海)는 과연 어디일까? 즉, 당시 그곳은 고구리의 강역이었다는 말인 것이다. 대부분 서해를 지금의 황해바다로 인식하기 쉬우나 서해는 서하(西河)로 글자 그대로 서쪽에 있는 황하를 말하는 것이고, 참고로 서하군은 지금의 섬서성 북부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서하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서하군은 고대의 위치가 한 곳이 아니다.
① 춘추 때 북부 하남성의 동쪽인 준현과 골현의 땅,
② 진·한 때 섬서성 진섬협곡의 양안 중 서쪽에 설치,
③ 당 태종 때 산서성 중남부 개체와 평요현 일대였다가 폐하고, 742년 서하군으로 고쳤다가 758년 분주로 복원됐다.
④ 당 현종 원년(742)에 서하군으로 바뀌었고, 건원 원년(758)에 분주로 복원됐다.
(원문) 西河郡古代所指不一。①春秋卫西境沿黄河,称西河,即今浚县、滑县等地。②魏取秦今陕西黄河沿岸地,置西河郡,则以晋陕间黄河为准,西岸为西河。③汉时西河郡是汉代名郡,西汉初由上郡析出,地在今黄河晋陕峡谷两岸。④贞观元年省介州,以介休、平遥二县来属,文水还并州。十七年以废吕州之灵石来属。④天宝元年改为西河郡,乾元元年复为汾州。
▲ 서하군은 황하의 서쪽인 섬서성 북부 <이미지=필자제공>
서하는 고구리 시조 추모대제(주몽) 12년(B.C 26) 친정해 빼앗은 이래 줄곧 고구리의 강역이었다. 광명대제(유리)를 거쳐 “대무신제 2년(29) 기축 정월, 한남(汗南)국이 가물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의지하려는 자들이 1000여 호가 되었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서하에서 살게 했다”라는 기록과 “14년(41) 신축년 엄표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태조황제 때는 “4년(115) 을묘 2월, 서하・남구・하성・안평・장령・도성・둔유・평곽・하양・고현・남소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했다. 12년(123) 계해 2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했다”와 “28년(139) 기묘 6월, 서하태수 상잠이 아우 번과 함께 맥의 기병을 이끌고 령동도위부의 진보를 빼앗아 돌아왔다. 9월 령동태수 공손현이 개마를 침략해 노략질하다가 패해 돌아갔다. 목도루는 서하를 지켜냈고, 상잠은 안평을 지켜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국천태왕 때 명재상 을파소의 부친이 서하태수를 역임한 적이 있는 고구리의 강역이었던 곳이다.
중국과 우리 사서에 언급돼 있는 海는 지금의 황해(黃海)바다가 아니라 바로 바다처럼 넓은 황하(黃河)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발해(渤海=대야택)와 같이 큰 내륙호수 또는 대평원을 일컫는 경우도 있고, 운해(雲海)일 경우도 간혹 있기는 하다. 즉, 海만 나오면 무조건 바다(황해)로 해석하는 것은 일제식민사학의 반도사관을 그대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서에 등장하는 海를 황하로 인식하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면 신기하게도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존 역사인식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읽지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위나라 대군을 격파한 중천태왕
중천태왕 재위 시절 위나라가 또 다시 고구리를 침략하는 일이 발생한다. 위나라 무구검의 침략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삼국사기>에는 “12년(259) 겨울 12월 왕이 두눌(杜訥)의 골짜기로 사냥을 나갔다.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니 왕은 정예기병 5000명을 뽑아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무너뜨리고 적군 8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간략하게 기록돼 있다.
이에 반해 <고구리사초략>에서는 “12년 기묘(259) 겨울 12월, 두눌(杜訥)의 골짜기에서 사냥하는데, 홀연 위나라 군대가 들어와서 노략질한다는 말을 듣고, 위위(衛尉)장군 목원에게 명해 날랜 정예기병 5천을 추려 양맥의 골짜기에서 되받아쳐 크게 깨뜨렸다. 위나라 군대의 장수 위지개를 참하고 8천여 급을 베었으며, 획득한 병장기와 마필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이를 양곡대전(梁谷大戰)이라 한다”라고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청색은 무(관)구검과 관련된 지명들, 적색 호태왕 진군로 상에 있을 부산 <이미지=필자제공>
위에서의 양곡(梁谷)은 양맥(梁貊)의 골짜기로 13년 전 위나라 무(관)구검의 2차 침공 때 초전에서 3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올린 곳이다. 양맥은 양수 근처 맥족(貊族=고구리)이 사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 위치와 관련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은 아래 컬럼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2152)
이어 “반적 왕간은 도주하였다. 태왕이 목원(穆遠)을 현도태수・부산공(冨山公)으로 봉하였고, 후에 마산공(馬山公)으로 고쳐 봉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토 지역은 부산 혹은 마산으로 불렸던 지역으로 보인다. 부산(冨山)은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나오는 산 이름으로 호태왕이 산서성 서남부에 있는 요서군에 속한 비려(碑麗=肥如)를 정벌하러 가면서 지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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