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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정변을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시키는 창조리의 국상 등용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3년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올렸다”고 간략하게 적혀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그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좌보(좌의정) 상루의 손녀 초씨가 을불과 정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은 그녀를 후궁으로 불러들여 소후로 삼아버린다. 이에 크게 상심한 상루는 노환으로 정무가 힘겹다는 핑계로 물러나고 대신 자신의 처남인 남부대사자 창조리(倉助利)를 천거하니, 봉상왕은 그를 대주부로 삼아 국상(國相)의 일을 대리하게 했으며 ‘죽려지인(竹呂之釼)’을 내려주어 극악무도한 죄인은 즉석에서 참수하도록 했다.
봉상왕 3년(294) 갑인 8월, 창조리는 죽려지인으로 간신 원항(猿項)을 참수해버린다. 원항은 봉상왕에게 “돌고는 달가의 무리이니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왕의 조서를 기다리지도 않고 곡림으로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찾아온 것은 제위를 찬탈하려는 뜻이 있었음이고, 때문에 거짓으로 모용외의 토벌을 칭한 것이었지 실제로는 은밀히 반역을 기도했던 것이옵니다”라고 무고해 죽인 간악한 자이다.
그리고는 원항은 돌고의 모친이자 중천태왕의 후비인 고씨를 강제로 거두어 첩으로 삼아버린다. 원항은 고씨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벌을 가하려 하자, 원항의 첩이 된 안국군의 부인 음씨가 고씨를 극력 두둔했다. 그러자 원항이 거짓 왕명을 발동해 우림군(羽林軍,황실근위군)을 불렀던 까닭에 창조리가 그를 즉석에서 참수해버린 것이다.
좌보 상루가 63세로 죽자 봉상왕은 연방을 좌보로,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했다. 봉상왕은 을불이 군대를 일으켜 장차 도성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자, 천하를 샅샅이 뒤져 을불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을불은 자신의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다.
서천태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모용외
▲ 황하 서안평 일대 <이미지=필자제공>
봉상왕 5년 병진(296) 8월, 모용외가 서천 땅을 침입해 노략질하고는 선황인 서천태왕의 무덤을 파헤치게 했다. 작업하던 인부들이 갑자기 죽어버리고 무덤 속에서 풍악소리가 흘러나오자 이에 기겁한 모용외는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파헤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자기 어미를 범한 추악한 도적 모용외가 신성한 광중(壙中)을 범하려 했기에 이런 신기한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광중이란 무덤 속에 시신을 안치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봉상상은 모용회가 또 침범할까 두려워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모용외의 군대가 강력해 우리 강토를 자주 침범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국상 창조리가 나서며 “북부대형 고노자(高奴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고노자 만한 인물이 없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봉상왕이 고노자를 신성(新城) 태수로 삼았는데, 역시 그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고 다시는 모용외가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체포된 을불을 탈출시키는 민심
6년 정사(297) 정월, 봉상왕이 조칙을 내리기를 “난신적자 돌고의 자식 을불이 도적 모용외의 창귀(倀鬼)가 되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소이다. 이를 사로잡아 오는 자가 있으면, 의당 대가로 봉하고 또 만금의 상을 내리겠소”라고 했다. 창귀란 범에게 앞장서서 먹을 것을 찾아준다는 못된 귀신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궁전이란 나라의 위용을 나타내는데, 지난해 가을 추악한 모용외가 쳐들어와서 서천의 신궁을 불태웠소이다. 이 궁전은 선황께서 태후와 함께 지내시던 궁이었소. 중수하여 선황의 영령께 돌려드려야겠소!”라고 말하고는 그 절차를 서두르라 엄명을 내렸다.
이듬해 창조리는 좌보(좌의정)가 된다. 당시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이 죽어 백성들이 무척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고단하여 원성이 심했는데도 봉상왕은 서천에 신궁을 짓는 공역을 급하게 서둘렀다. 반옥령에서 생산되는 청옥을 서천으로 옮기는 작업으로 사람마다 옥판을 두 개씩 짊어진 행렬이 길게 뻗쳤고, 길바닥에는 엎어져 죽은 자들이 많았으며 옥판을 깨뜨렸다고 죄를 받은 백성들이 하루에도 백여 명이나 되니, 서로들 뭉쳐서 도둑이 되어 관청을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군대도 관청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9월에는 을불이 개마(盖馬)의 부락인 최체(最彘)현에서 점선(秥蟬)현으로 와서 대방(帶方) 땅의 5부들과 회맹하려다가 그곳의 교위에게 붙잡혀서 함거에 실려 도성으로 압송되는 일이 발생한다. 을불을 실은 함거가 주막집에 이르자 대로를 가득 메웠던 도둑들이 함거를 부수고 을불을 탈출시킨다. 이를 보고받은 봉상왕이 크게 노하며 풀어준 도둑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다시 을불을 찾으라고 어명을 내렸으나 다들 관망만 할 뿐 찾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 산서 동남부와 북부하남성에 있던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으로 날조되는 근거로 사용된 ‘점제현신사비’ <이미지/사진=필자제공>
여기서의 점선현과 대방 땅은 아래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현의 지명이다. 당시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이고, 낙랑군은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심수 주변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유주) 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패수), 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점선),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점선현은 일명 ‘점제현 신사비’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에서 비문에 ‘秥蟬’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일제식민사학은 이 문구를 근거로 낙랑군 점제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비정했다. 물론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비석을 몰래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이렇듯 <고구리사초·략>은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조작된 우리 역사를 바로 찾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사서이다. 일제가 이 사서를 일본으로 가져가 궁내청(왕실) 서고에 보관해 왔는데, 그곳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던 남당 박창화 선생이 필사해 그 내용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우리에게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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