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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컬럼에서는 길림성에서도 작은 현급 도시인 집안현에서 광개토호태왕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동양사학계가 집안현을 천하의 대제국 고구리의 도읍 국내성으로 비정했는데, 그곳에 있는 호태왕비는 역사왜곡을 위해 중원 어딘가에서 옮겨진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여러 가지 관련 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호태왕비는 과연 어디에서 옮겨진 것일까? 그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누가 호태왕비를 옮겼느냐에 대해 알아야 한다. 흔히들 1883년경 일본 관동군에 근무하던 사케오 가케노부(酒句景信) 중위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탁본을 처음으로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이유로 일제가 옮겼다고 쉽게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일제가 만주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그전에 일제가 주동해서 중원에서 호태왕비를 옮길 수는 없고 아마 청나라 때 비를 옮겼을 것이다. 그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로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태왕비는 국가차원에서 역사왜곡을 위해 옮겨졌기 때문에 그 기록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원래 호태왕비가 있던 장소를 알아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원래 호태왕비가 있던 장소로 볼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 그곳은 바로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永樂鎭)이라는 곳이다.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지명 ‘영락진’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예성현(芮城縣)에는 영락진(永樂鎭)이라는 지명이 있고, 원래 그곳에는 영락궁(永樂宮)이라는 행궁이 있었다. 역사상 영락이라는 연호를 쓴 황제는 고구리 광개토호태왕과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뿐이다. 중국은 영락진이 영락제와 관련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영락진의 연혁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과 영락궁 <이미지=필자제공>
1.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永樂縣)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영락현 : 후위에서 설치했다. 북주 때 북평고현으로 옮겨 다스렸기에 폐했다. 북주에서 설치했다.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 송나라 때 진으로 했다.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원화지> <환우기>에 모두 주나라가 영락현을 설치했고, 군으로 되지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된 것은 오기이다.
(원문) 永乐县 : 后魏置,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
위 밑줄 친 문구에서 영락현은 광개토호태왕의 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리사초·략>에는 호태왕의 능을 황산(黃山)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황산과 위 황성현(黃城縣)이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국원제 13년(343년) 도읍을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는데 위 황성(黃城)과도 틀림없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永樂縣)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북주 때 치소로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가 황성현의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으로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일백이십리에 있다. <환우기> 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가진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고 盖자는 오기다. 한나라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고구리 장수태왕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 천보 원년(742년)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원문) 后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后魏置,故治在今河北省徐水县西。后魏置,故治在今山西祁县东。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汉为北平县,北魏称永乐县,唐天宝元年(742)改为满城县。
밑줄 친 문구는 영락현이라는 지명이 북위(386~534) 때 최초로 설치되었다는 설명인데, 이때는 고구리 광개토호태왕과 아들인 장수태왕이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영락진이라는 지명은 광개토호태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락현을 한나라 때는 북평현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북평현(영락현)이 역사왜곡을 위해 북경으로 지명이 이동된다. <이미지=필자제공>
3.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영락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번역) 동위 540년 북평현 서북 땅을 쪼개 영락현을 설치해 낙랑군에 속하게 해 치소로 했다. 북주 때 영락현을 창려군으로 했다가, 북주 때 북평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 문제 3년(583)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이역주로 변경했다가, 수양제 3년(607)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고 영락현으로 거듭 다스렸다. 당 고조 4년(621) 영락현을 역주에 바꿔 속하게 했다. 천보 원년(742)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원문) 东魏兴和二年(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한서지리지>에 북평군은 유주(幽州)에 속한 군(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76년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광개토호태왕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벽화에 그려진 13개 태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은 원래 산서성 남단에 있던 이 북평을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북경 일대로 옮겨다 놓았다.(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974 참조)
▲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올리는 13 태수 중에 북평 태수가 있다. <사진=필자제공>
영락궁(永樂宮)은 누구를 위한 건축물인가?
현재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에 있는 영락궁(永樂宮)은 원래 예성현 서남쪽 황하변 영락진(永樂鎭)에 있던 것을 삼문협수고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될 위험이 있어 현재 예성현으로 옮긴 것이다. 과연 이 영락진이라는 지명과 영락궁이라는 건축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광개토호태왕의 능과 비석이 있던 곳으로 100% 확정지을 수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예성현 영락궁에 전시되어 있는 원래 영락현 영락궁 모형도의 본전 건물 뒤에 곡장이 쳐진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영락진에 있는 영락궁 내에 있는 무덤은 영락대제 광개토호태왕의 능이 아닐까 한다.
▲ 예성현 영락궁에 전시된 옛 영락현 영락궁의 모습(위 사진)과 옛 영락현 영락궁 모형도 맨 뒤 본전 건물 뒤에 있는 무덤과 곡장 <사진=필자제공>
현재 길림성 집안현에 서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돌 성분은 필시 이곳의 돌 성분과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소유권이 현재 중국에 있으니 정밀검사를 할 방법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참고로 고구리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무덤도 영락진 뒷산인 구봉산(九峰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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