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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아시아대륙 지배한 제국의 왕 비석이 옮겨졌다

by 고구리역사 2024. 3. 13.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174

 

스카이데일리, 아시아대륙 지배한 제국의 왕 비석이 옮겨졌다

스카이데일리, 지난 컬럼에서는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호태왕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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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컬럼에서는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호태왕비가 19세기말 최초로 발견되기 이전에 그곳에 있었다는 우리의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큰 비석이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번 연재에서는 역사왜곡을 위해 그 비석이 중원 어딘가에서 집안현으로 옮겨졌음이 확실하다는 여러 가지 물증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받침돌(비대석)이 없는 호태왕비
높이가 6.34m나 되고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지반의 침하를 막고 비석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 받침돌(碑臺石)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900년 초에 촬영된 사진에는 호태왕비는 받침돌이 없는 상태로 세워져 있다. 받침돌도 없는 상태에서 1500년 동안 지반침하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호태왕비에는 가로 2.7m x 세로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돌이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어져있으며, 비석의 위치가 대석의 정중앙이 아니라 한쪽 끝에 치우쳐 있다.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현재의 비대석은 원래 호태왕비의 받침돌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급조된 것으로, 37톤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 작은데다가 조잡하고 부실하다보니 약 백년 만에 이렇게 깨지고 침하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 최전성기 때 원래 위치에 호태왕비를 세웠을 당시에는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 현재 대석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원래 대석이 아니라는 증거이며(위 이미지), 최초에 대석도 없이 민가 옆에 서있던 비석의 모습. <사진/이미지=필자제공> 

관석도 없는 호태왕비
조선왕조 때 지체가 어느 정도라도 높은 사대부의 묘비에도 대부분 관석(冠石)을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아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정복군주인 고구리 광개토호태왕의 공적비에 관석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현재 호태왕비의 상부가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흠집자국이 심하게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삿갓형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이 거대한 관계로 원래 관석은 엄청나게 컸을 것이므로 인력으로 내리고 올리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 비석이 있던 곳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석을 뽑아 배로 집안으로 옮긴 다음 비석을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관석은 어딘가에 버리고 비석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 관석의 흔적이 뚜렷한 호태왕비(아래 사진)와 두 가지 형태의 공적비 모두 관석과 대석이 있는 이미지. <사진/이미지=필자제공>
 
산릉이 아니라 평지에 서 있는 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 비문에는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했다.(甲寅年 九月甘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라고 조각되어있고,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궁내청 서고에서 필사한 <고구려사초·략>에 따르면 "태왕을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집안현에 있는 태왕릉은 비석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돌무덤 근처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광개토호태왕의 능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압록강과 산 사이에 있는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크다보니 편의상 압록강변 평지에 비석만 옮겨다놓고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왕릉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은 누군가가 비석을 현 위치에 옮겨다놓고 근처 돌무덤 근처에 묻어둔 것으로 추측된다. 37톤짜리 거대한 비석도 옮기는 판에 그까짓 작은 벽돌 하나 옮기는 것쯤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현 태왕릉이 어느 왕조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 주인공이 광개토호태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 등고선이 뚜렷한 집안현 지도에 압록강과 산 사이에 있는 호태왕비(위 지도)와 실제로 태왕능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 <사진/이미지=필자제공>

단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현재 집안에 있는 호태왕비가 언제 어디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중원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리의 영토를 상실한 고려와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어딘가에서 옮겨졌기 때문에 대석과 관석도 없이 비문과 다르게 산릉이 아닌 평지에 비가 서있는 것이다.
만일 옮겨졌다면, 비석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해변과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최근 광개토호태왕 비석의 돌 성분이 집안 근처 산에 있는 돌 성분과 다르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가 옮겨졌다는 단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의 다음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일찍이 호태왕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해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도리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위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는 만주 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산에다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내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연히 있어야할 대석이나 관석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집안이 고구리의 도읍이 아니라는 과학적 증거
현재 동양사학계에서는 집안을 고구리의 도읍이었던 국내성과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집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광개토호태왕의 공적비와 태왕능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며, 환도산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국내성 북쪽 산성에서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집안이 아시아대륙을 지배했던 대제국 고구리의 도읍이었을까?
집안은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길림성 통화시에 속해있는 현(縣)급 작은 도시로 압록강변 북쪽에 있다. 크기는 동서 80km 남북 75km이고, 산 면적이 83.5%이고 현재 인구 23만의 작은 도시로 출입로가 거의 외길로 교통이 좋지 못한 도시이다. 모름지기 국가의 도읍이란 사통오달하는 위치에 있어야하거늘, 집안은 국가의 도성으로는 부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러한 곳에 대제국 고구리의 도읍인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삼국에 일식이 있어났다는 기록이 총 66개가 있는데,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이 중에 53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였다고 발표된 적이 있다. 삼국 중 고구리에는 11개의 일식(日蝕) 기록이 있는데, 이 중 8개의 일식이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 고구리 일식의 최적 관측지는 바이칼호 동쪽과 청해성(아래 이미지)이며, 한반도에서는 빗금친 부분만이 모든 일식을 관측할 수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8개의 일식을 집안에서는 일부 볼 수 없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고대에는 농경 및 군사 등에 천문이 중요했기 때문에 감성(監星) 즉 천문대는 도성의 왕궁에 두는 법이다. 이러한 박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는 고구리의 감성이 집안에 없었다는 말로, 집안이 고구리의 도읍인 환도성과 국내성이 아니라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