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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려 환도성·국내성은 중국 내륙에 있었다

by 고구리역사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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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려 환도성·국내성은 중국 내륙에 있었다

스카이데일리,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중국사서의 기록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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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필법으로 기록된 중국사서의 기록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중국은 일명 관구검기공비로 둔갑시킨 조그마한 석판을 길림성 집안현에 옮겨다놓고 그곳이 마치 고구리의 도읍 환도성이었다는 역사왜곡을 자행했고, 일제식민사학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의 역사강역을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국한하는 반도사관을 고착시킨다.
물론 그렇게 역사를 조작하면서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구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일제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구를 기록적 근거로 하고 있다.
참고로 <괄지지>는 당태종 이세민의 4째 아들 이태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4년간에 걸쳐 편찬한 본서 550권과 <서략(序略)> 5권으로 구성된 지리총지이다. 남송 때 산실(散失)되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전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기에 여러 사서나 개인문집 등에 단편적인 자료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괄지지>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우리의 다른 기록과 상충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안시는 곧 환도”라 했으며, 같은 <삼국사기>에도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중국은 환도성을 국내성으로 보았는데, 우리는 환도성을 안시성이라고 기록했다.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은 환도성과 국내성이 길림성 집안현에 있었다고 하면서 안시성은 요녕성 요하강변 안산시에 있는 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어, 위 우리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그리고 길림성 집안현이 고구리의 도성이 맞는지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 고구려 국내성과 환도산성으로 잘못 비정되어 있는 길림성 집안현 <이미지=필자제공>

참고로 요서를 난하(灤河) 서쪽으로 주장하는 일부 재야사학에서는 환도산성을 하북성 진황도시 청룡현에 있는 도산(都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비슷한 지명이라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은데, 가보면 도산까지 오르는 길조차 없고 청룡현은 집안현처럼 교통이 불편하고 협소해 국가의 도읍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지도의 지명만 보고 함부로 비정하는 행위는 역사발전을 위해 없어져야 할 것이다.
환도성(안시성)는 어디인가?
먼저 위 <괄지지(括地志)> 이외에 고구리의 도성에 대해 기록해 놓은 중국의 다른 사서를 찾아야 한다. 그러한 기록을 찾지 못하면 <괄지지>의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래 <신당서 열전 145-동이>에 고구리의 도성에 대한 기록한 문구가 있어 이를 인용한다.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鸭头号鸭渌水, 历国内城西, 与盐难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 以巨舻济人 因恃以为堑)”
위 기록은 마자수(馬訾水) 또는 당취수(唐就水)라고도 불렸던 우리의 압록수에 대한 설명인데, <한서지리지>에도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라는 기록이 있다.
위 두 기록에 따르면, 국내성·평양성·안시성·서안평 모두 압록수 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재 압록강, 국내성을 압록의 북에 있는 집안현, 평양성을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단동, 그리고 안시성은 요하강변에 있는 안산(鞍山)으로 비정했다.
만약 <신당서> 기록이 옳다면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의 이러한 지리비정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당서> 기록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중국과 일제는 이러한 지명이동을 통해 우리의 역사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고 우리의 찬란했던 고대사를 왜곡하는 작태를 저질렀던 것이다.
 ▲ 현재의 역사이론대로 그려진 고구려 지도 <이미지=필자제공>

그렇다면 진짜 압록수가 어디 강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압록수(마자수)를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에 가져다 놓고 위 <신당서>를 해석하면 희한하게도 지리비정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서안평은 분하와 황하가 만나는 하진시, 안시성은 여량산맥의 남단 직산현, 평양성은 임분시, 국내성은 평요시로 비정되어진다. 여기서의 海는 바다가 아니라 바로 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지명비정이 옳은 이유는 아래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바로 안시와 서안평이 유주에 속한 요동군에 속한 18개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유주는 요서군의 상징인 백이·숙제의 무덤과 낙랑군의 상징인 패수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짐으로써, 황하 북부에 있는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로 비정되었다. 또한 <한서지리지>에 압록수는 2,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현 분하의 길이인 716km와 크게 차이가 없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18개 현이 있다):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 산서성 중남부에 있던 고구리의 도읍(왼쪽)과 지명이 집안으로 이동된 환도산성 <이미지=필자제공>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은 산서성 남부
여기서 다시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에 필자가 비정한 관련지명을 대입해보기로 하겠다.
고구리 동천태왕이 공손연 멸망 후 공손연이 차지하고 있던 서안평(하진시)을 공격해 빼앗자, 산서성 남부 문희현 출신 관구검이 고구리를 침공했다가 1차 비류수(沸流水) 전투에서 참패한다. 비류수는 산서성 남부 강현에서 나와 회수로 흐르는 작은 강이다. 이어 관구검은 2차 양구 전투에서도 패하는데, 양구는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를 흐르는 양수(梁水)의 입구이다.
2차례나 관구검을 격퇴시킨 동천태왕은 이후 자만에 빠져 대비를 안일하게 했다가 죽기 살기로 덤비는 관구검에게 크게 패해 도읍인 환도성을 적에게 내어주고는 남옥저로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유유와 밀우의 분전으로 전열을 재정비한 동천태왕은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도성으로 되돌아온다.
동천태왕이 달아난 남옥저는 낙랑군 땅으로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 동남부의 땅이었다.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계에 이르러 각석기공을 했고, 또 환도산에도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는 불내성(不耐城)과 남옥저에 대해서는 아래 컬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라 땅 옥저의 위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590)
 ▲ 관구검의 활동무대는 산서성 남부였다. <이미지=필자제공>
 
이상과 같이 알아보았듯이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은 모두 산서성 남부에 있었다. 관구검이 고구리를 침공한 이유는 관구검의 고향이 산서성 남부 문희현으로 그 부근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관구검이 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땅 길림성 집안현을 공격했다는 것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억측인 것이다.
 ▲ 환도성이 집안으로 둔갑되어 그려진 관구검 침공도 <이미지=필자제공>
 
일명 관구검기공비라고 하는 작은 석판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므로 석판이 발견된 집안현이 고구리의 도성 환도성이라고 비정하는 것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고, 현토태수 왕기가 숙신 남쪽 바위에 새겼다는 각석기공을 집안 부근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 역시 부질없는 짓인 것이다. 관구검기공비는 도성으로 돌아온 동천태왕이 즉시 갈아 없앴을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괄지지>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환도성이 국내성과 인접해 있었다면, 환도성은 산서성 중부 평요고성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관구검과 동천태왕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다. 관구검의 고향 부근이기도 하면서 고구리와 전투를 벌인 비류수와 양구가 산서성 남부에 있기 때문에 환도성이 안시성이라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안시성을 설명하는 기회에 다시 상세히 언급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