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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관구검 활동무대 보면 ‘기공비’ 존재 불가능

by 고구리역사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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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관구검 활동무대 보면 ‘기공비’ 존재 불가능

스카이데일리, 관구검의 침공 때 고구리의 도읍 환도성에 세웠다는 각석기공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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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의 침공 때 고구리의 도읍 환도성에 세웠다는 각석기공비의 일부가 1906년 길림성 집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석판에 새겨진 48자의 문구로 보아 그것은 일명 관구검기공비가 아니라 당시 동시대를 살면서 5품급 장군을 지낸 다른 사람의 공적비석임이 밝혀졌다.
상식적으로 관구검기공비는 지금까지 존재할 수가 없는 비석이다. 왜냐하면 관구검이 장군 왕기를 시켜 동천태왕을 쫓아가다 숙신의 남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記功)을 했고, 또 환도산에도 불내성(不耐城)이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공적비석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있는 큰 바위에 공적을 새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하튼 고구리는 관구검에게 잠시 도성이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는 했으나 얼마 후 유유와 밀우의 살신성인으로 동천태왕이 위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환도성으로 돌아온 후 그 치욕의 각석기공한 현장을 그대로 두었겠는가? 아마 그 당시에 깨뜨리고 갈아서 흔적조차 없애버렸을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은 호태왕비가 있는데다가 1906년 관구검기공비까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길림성 집안현을 고구리의 도성인 환도성과 국내성으로 확정했다. 그 근거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중국이 저지른 역사조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관구검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
 ▲ 길림성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안내비(위)와 <괄지지>의 기록대로 고구리 도성 국내성과 환도산성으로 확정된 집안현의 지도. <사진/자료=필자제공> 

과연 그런지 상세히 알아보려면 먼저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관구검은 우리에게 성이 관(毌)씨이고 이름이 구검(丘儉)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성이 무구(毋丘)이고 이름이 검(儉)이다. 꿰뚫을 毌자와 말(금지) 毋자가 아주 흡사하기 때문에 온 착오이다. (본 컬럼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하 관구검이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희구씨원류고(闻喜邱氏源流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원>의 해설에 의하면 “무구 : ① 고대지명이다. <사기 경중전완세가>에 선공과 정인이 서성에서 만나 위를 정벌하고 무구를 취했다. ② 2자 성씨로 한나라에는 무구장이 있고 삼국시기에는 무구검이 있었다. 사서에 의하면 하동 문희 무구씨는 춘추5패의 하나였다. 문희성 남쪽 무구촌의 땅을 성씨로 했고, 그 마을에 무구산이 있는데 황화령이라고도 불린다”
(원문) 据《辞源》解释:“毋丘:①古地名。《史记·敬仲田完世家》:宣公与郑人会西城,伐卫,取毋丘。②复姓。汉有毋丘长,三国时魏有毋丘俭。又据史书所载:”河东闻喜毋丘氏为春秋五霸之一。闻喜城南毋丘村以地为氏,此村有毋丘山,也称黄花岭。
무구씨 시조의 8세손인 관구검은 고양향후를 지낸 무구흥의 아들로 산서성 남부에 있던 하동군(河東郡=현 운성시) 문희현(文喜縣) 출신으로, 아비가 죽자 작위를 물려받았고 평원후문학 벼슬을 지냈다. 문희현은 고구리의 신성(新城)이 있던 곳으로 고구리 멸망 뒤 설인귀의 안동도호부가 평양성에 있다가 옮겨간 곳이다.
고양(高陽)은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 찰현이고, 평원(平原)은 <수경주>의 “탁수(𣵠水)는 동쪽으로 평원군 남쪽을 흐른다(涿水东径平原郡南)”라는 문구로 보아 그의 고향 문희현 부근에 있는 탁록을 말하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출신지와 활동무대로 보아 무구검은 원래 고구리 출신이었으나, 위나라로 전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는 공손연을 공격하기 이전에 산서성 동남부에 있던 오환(烏桓)을 포섭해 동맹을 맺는다. 235년 위나라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보내면서 도요(度遼)장군을 추가했고, 236년 관구검이 연왕 공손연을 토벌하려 했으나 패퇴했다가, 237년 사마의와 연합해 다시 진군해 공손연을 멸망시킨 공으로 안읍후(安邑候)에 봉해져 식읍 3900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관구검이 위나라의 지역제후가 된 안읍(安邑)은 연왕을 자칭했던 공손연이 있던 곳으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로 나타난다. 즉 이곳이 대대로 연(燕)의 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나라가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번역) “안읍현은 하나라 우의 도읍이고, 전국시대 위나라의 도읍이다. 한나라 때 안읍현을 설치했는데, 지금의 하현 안읍현의 땅이다. 후위 때 안읍을 나누어 남안·읍북·안읍의 3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북안읍을 하현이라 했는데 지금의 산서성 하현 북쪽이다. 청나라 때 산서성 해주에 속했고, 민국 때 운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원문) 安邑县 : 夏禹所都,春秋时魏绛自魏徙此,战国为魏都,汉置县,今夏县安邑县之地,后魏分安邑为南安、邑北、安邑三县,旋改北安邑为夏县,故城在今山西夏县北,即后魏分置之县也,清属山西解州,民国移治运城,寻复故,属山西河东道,县境有盐池,为山西省惟一产盐之区,左传谓郇瑕氏之地,沃饶而近盐,即指此地而言,池水不流,凝成固粒,朝取夕复,终无灭损,其利甚溥。
이상과 같이 알아보았듯이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의 대부분은 산서성 남부였다. 그런 관구검이 현재의 역사이론대로 하자면, 북경 일대를 다스리는 유주자사에 임명되고 고구리의 환도성이 있다는 길림성 집안까지 머나먼 길을 원정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관구검의 최후는 불운했다. 실권자 사마사의 전횡에 분노한 관구검은 255년 문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으나 문흠이 사마사에게 패하면서 관구검은 야반도주하게 되고 도중에 활에 맞아 죽어 그 목이 낙양으로 보내진다. 이후 장남도 反사마씨 봉기를 일으켰다가 주살되었고, 손자는 후에 서진시대가 되고나서야 출사했다.
 ▲ 산서동부에 그려진 산서박물관의 오환 지도(위)와 관구검의 활동지역인 산서성 남부 지도 <자료=필자제공>
 
고구리의 도읍 환도성
고구리의 도읍인 환도성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고구리는 산상왕 2년(198) 환도성을 쌓고 13년(209)에 도읍을 옮겼으나, 동천왕 20년(246)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성이 파괴되어 다시 국내성으로 옮겨 96년간 머물다, 고국원왕 12년(342)에 환도산성을 수리하고 옮겼으나 같은 해 10월 모용황의 침략으로 환도산성이 함락되고 파괴되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되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길림성 압록강 변에 있는 집안이 국내성과 환도산성으로 비정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안시는 곧 환도”라고 했으며, <삼국사기>에도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리의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은 바로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 당태종 이세민의 눈알을 뺀 그 유명한 안시성(安市城)이라는 것이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은 기록일까?
<다음 연재에서 고구리의 도성 환도산성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