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2467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1차 침공을 비류수에서 대파하고, 2년 후 다시 침공한 관구검을 양구에서 대파한 고구리 동천태왕은 자만에 빠져 방심하다 졸지에 많은 군사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는 도성인 환도성을 버리고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동천태왕 20년(246) 겨울 10월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고구리의 도성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백성들을 도륙내고 보물들을 챙겼다. 그리고는 바로 현토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태왕을 추격하게 했다.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천태왕은 통곡하면서 목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다가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다 흩어져버려 거의 없어지고 오직 밀우(密友)만이 동천태왕 곁에 있게 되었다. 밀우는 태왕에게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벗어나지 못할 형세이오니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막아보겠사오니 그 틈을 타서 태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말하고는 결사대를 모아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전력을 다해 싸웠다. 백성들 역시 평소에 태왕의 성덕을 흠모하고 있었던지라 모두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사이 동천태왕은 샛길로 빠져나와 산골짜기에 의지하며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는 군사들에게 "만약 밀우를 구해오는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옥구가 앞으로 나서며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자청하고는, 전장으로 달려가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는 들쳐 업고 돌아왔다. 동천태왕이 자신의 허벅지에 밀우를 눕혔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 부상을 입어 기절한 밀우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힌 동천태왕. <이미지=필자제공>
동천태왕은 다시 사잇길을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들이 쉬지 않고 추격하는지라 태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유유(紐由)가 나서며 "형세가 위급하다해서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이 어리석으나마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대접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된다면, 그 때 태왕께서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시면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자, 태왕이 "그리 하겠노라"라고 말했다.
유유가 위나라 진중에 들어가 거짓 항복을 위장하고는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해(海)로 도망했으나 이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해 귀국의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소신을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이나마 대접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했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감추어 간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자 위나라 진영이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동천태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니 위나라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퇴각해버렸다. 이때 관구검의 군대는 고구리 도성(환도)에서 이미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 현 사학계의 위나라 관구검과의 전쟁도 및 동천태왕의 도주로. <이미지=필자제공>
고구리가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잠시나마 큰 난리를 겪는 중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왕준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와 관구검을 돕자, 백제의 고이왕은 그 허를 틈타 장수 진충을 시켜 이 두 곳을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을 잡아가는 어부지리를 취했다. (낙랑의 위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3624)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도성으로 돌아온 동천태왕
마침내 동천태왕이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도읍인 환도성으로 돌아와 공적을 평가하니 단연 밀우와 유유가 1등 공신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고, 유유에게는 대사자로 추증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로 하여금 그 자리를 잇도록 했다.
태왕은 도성인 환도성이 관구검에게 몹시 파괴되어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던 평양(平壤)에 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동천태왕은 위나라 관구검에게 잠시나마 변을 당한 이후로는 정사에 권태감을 느껴 오로지 유람하며 사냥하기와 여색에 빠져 세월을 보내면서, 태자에게 정사를 맡아보게 했다.
22년(248) 7월 태왕의 모후인 주통태후가 더위를 먹어 심한 설사병으로 춘추 67세에 죽자 고향인 주통촌에 모셨다가 나중에 아들 동천태왕의 릉에 합장했다. 애초에 태왕이 모후와 함께 이곳을 점지했고, 태왕이 붕어해 동천(東川)에 묻히자 한 무덤에서 모자가 서로 다른 방을 가지게 되었다.
9월, 태왕이 사냥한 후 주통촌에 있는 모후의 능을 참배하고는 병이 들더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붕어하고 말았다. 비보를 들은 연후가 쫓아와서 몸을 불살라 죽자, 황후와 여러 비빈들도 모두 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울부짖었다. 이에 태자가 두 공주들과 함께 이들의 자살을 막아 목숨을 건지게 했다.
백성들 모두 태왕의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조정의 대신들과 후궁들 그리고 민간의 여자들까지도 장례일에 동천릉 앞에서 순사(殉死)함이 끊이지 않았다. 순사한 시신을 싸리 섶으로 덮어주었는데 그 행렬이 끝이 없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시원(柴原)이라 불렀고, 백성들은 “다정했던 천자께서 용이 되니, 무덤 앞 싸리 섶 모두 하늘 꽃으로 만발했다”고 노래했다.
길림성 집안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
중국의 기록인 <삼국지 관구검열전>에 “(정시 6년(245)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이 매구로 달아났다.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해 옥저를 지나 천 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환도산과 불내성에 글자를 새겨 각석기공을 했다.(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라는 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가 무분별하게 중국기록을 보고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닌가 한다.
▲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는 조작인가? <사진=필자제공>
그런데 그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석각의 일부가 1906년 길림성의 집안현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일명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라고 불리는 이 석판의 길이는 25.7cm x 너비는 26.4cm이고, 글자의 크기는 약 2.7cm인데 비면의 좌우와 아래쪽이 떨어져나가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여하튼 석판에는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작된 관구검기공비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상세히 밝혀집니다>
'고구리 대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구검 활동무대 보면 ‘기공비’ 존재 불가능 (0) | 2024.03.13 |
---|---|
고구려 점령 날조…조작 ‘관구검기공비’ 가짜 (0) | 2024.03.13 |
위나라 관구검 1차 침략서 대승한 고구려 (0) | 2024.03.13 |
“중국은 3천년간 한민족 단 한번도 이긴 일 없다” (0) | 2024.03.09 |
고구려, 위·오·촉 삼국시대 대륙의 실질 패권국가 (3) | 2024.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