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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태왕(동양대제)의 등극
고구리 산상태왕 8년(204) 요동세력을 세운 공손도(公孫度)가 죽자 장남 공손강(康)이 뒤를 이었고, 221년 강이 죽자 동생 공손공(恭)이 섰다가 228년 강의 아들 공손연(淵)이 숙부를 감금하고는 연왕(燕王)을 자칭했다가, 238년 위나라 사마의(司馬懿)에게 토벌될 때까지 공손씨는 3대에 걸쳐 50여 년간 요동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군림했다.
이즈음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 헌제의 왕위를 찬탈하고는 위(魏)나라라 칭하자, 221년 유비가 촉(蜀)을 세우고는 스스로 황제라 했고, 229년 손권이 오(吳)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드디어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사라지고 위·오·촉의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산상태왕 31년(227) 태왕께서 종창으로 몸이 문드러져 55세에 붕어하니 아들 동천태왕이 등극했다. 어머니는 주통천의 소후였고 돼지사건으로 아들을 얻었다하여 아명이 교체(郊彘)였고, 10살 때 정윤(동궁)이 되고 19세에 보위에 오른다. <삼국사기>에는 휘(이름)를 우위거(憂位居)라 했고, <고구리사초·략>에는 위궁(位宮) 또는 하위거(夏位居)라고 달리 기록되어 있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887 참조)
동천태왕은 외모와 얼굴이 우아하고 출중했으며, 백성과 하급관리를 아꼈다. 또한 용력도 있어 말을 타고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무술을 좋아해 병사들도 새로이 조련했고, 동명(주몽)의 큰 뜻(다물)도 있었으며 즐겁거나 노여워도 겉으로 표시내지 않았다. 시녀가 실수로 고깃국을 어의에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을 다치지 않았느냐?”라고 물을 뿐이었다.
▲ 갈기 없는 말의 우울한 모습. <사진=필자제공>
또한 우황후가 그의 도량을 시험해보려고 태왕이 외출한 사이 사람을 시켜 태왕이 아끼는 애마의 갈기를 잘라버리게 했다. 태왕이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더니만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져주면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심히 가련하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랫사람이나 윗사람 모두 태왕의 인자함과 관대함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리와 위·오·촉 삼국과의 관계
고구리 동천태왕 당시 시대적 배경을 보면 중국은 후한이 망하고 위·촉·오 삼국이 쟁패하고 있었으며, 요동지역에는 공손씨가 자리 잡고는 고구리, 위나라, 동오와의 사이에서 외교적 줄다리기를 하는 등 국제관계가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요동지역은 본래 고구리의 땅이었지만 역적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도움을 청한 뒤 공손씨의 소유가 되어버린 곳이다.
독자세력을 구축한 공손씨는 위나라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고구리와는 완전 적대관계였다. 동천태왕 5년(231) 위나라가 공손연을 요동태수・거기장군으로 봉해 고구리의 현토성을 기습하도록 하자, 이에 태왕은 우위장군 주희에게 명해 이를 쳐서 깨뜨렸다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동천태왕 6년(232) “3월 동오의 손권이 海(황하)를 건너 공손연과 밀통했다. 공손연은 사신을 동오에 보내 칭송하며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공손연은 간사한 꾀로 위나라와 동오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왕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라 칭하며 위나라를 함께 치기를 제의했다. 이에 손권이 군사를 공손연에게 보냈는데 공손연이 위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미끼로 삼기 위해 동오의 장군들을 죽이려 하자, 이들은 고구리로 도망가 고구리에게 연합해 공손씨를 치자고 제안한다.
7년(233) 9월 손권이 고구리에 사신을 입조(入朝)시켜 ‘바치려 했던 금보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태왕은 사신들이 멀리서 왔음을 흡족해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고 조의들로 하여금 동오까지 호위해주었으며,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하사(下賜)하며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니 믿을 바 못 된다”고 충고했다는 <고구려사초·략>에 기록에서 당시 고구리와 동오와의 역학관계를 알 수 있다. 동오는 당시 호북성 악주 일대에서 523만호(350만)의 작은 나라였고, 고구리는 황하 이북을 통치하는 엄청난 대제국이었다.
▲ 당시 위·오·촉 삼국의 인구는 천만이 넘지 못한 소국들이었다. <이미지=필자제공>
위나라는 간악한 공손연을 제거하기 위해 공손연에게 위나라의 ‘대사마 낙랑공’으로 봉한다는 사신을 보내면서 공손연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음모를 미리 간파한 공손연이 병사를 많이 늘어세워 위엄을 보이면서 책명 받는 곳을 포위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위나라 사신은 아무런 음모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동천태왕 8년(234) 정월 동오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여름 4월에는 위나라의 조예(조조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 병서・보검・옥상 등을 바치며(獻) 함께 공손연을 멸하고 오나라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즉 고구리가 공손연을 치면 위나라가 돕고 위나라가 동오를 치면 고구리가 돕기로 하고, 둘을 멸망시키면 동오는 위나라가 공손연의 요동은 고구리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동천태왕 10년(236) 2월 손권의 사신이 찾아와 화친을 청했다. 그런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예물 또한 야박했기에 태왕이 화를 내며 사신에게 “너희 왕은 공손연을 끔찍이도 섬기면서, 짐을 섬기는 것은 어찌 이리도 야박한가?”라고 하문하자, 사신은 “예물은 여러 번의 풍파로 인해 물에 빠뜨렸음이고, 말씀과 뜻은 공손연에게 함과 같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태왕이 “지난해에도 너희 사신들이 나를 속이더니, 너도 다시 그러는 것이냐?”라고 말하고는 사신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삼국사기>에는 동천태왕 10년(236) 손권이 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구금했다가 7월에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리사초략>에는 공손연이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천태왕 11년(237)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는 공손연과 합치니,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는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태왕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책을 상의하도록 명했다.
▲ 잘못된 반도사관에 입각해 그린 공손씨 공격도. 동오가 황해를 횡단했다는 것은 넌센스. <이미지=필자제공>
그러자 위나라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삼아 선비・오환과 함께 요대에 진을 치고 공격했으나 공손연이 먼저 나와 이들을 격파해버린다. 관구검은 다시 싸우고 싶었으나 큰비가 열흘이나 내려 요수가 넘실대는 바람에 군사를 잃을까 겁이 나 우북평으로 철수해버린다. 이를 틈타 고구리 군대가 현토 서쪽 땅 백 여리를 얻게 된다.
동천태왕 12년(238) 위나라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했다. 위나라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태왕은 주희에게 명해 5천 군사를 이끌고 남소로 출병해 관망타가 지원하라 명했다. 이로서 공손씨의 요동은 3대 50년 만에 망하게 된다. 공손연을 멸망시켰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해졌다. 이에 동천태왕이 노해 사마의와의 소통을 끊어버린다.
▲ 산서성 남부 황하변에서 현 압록강 하구로 이동된 서안평. <이미지=필자제공>
공손씨가 멸망하면 ‘려위동맹’에 의해 요동을 당연히 고구리에 돌려주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자, 동천태왕이 대노해 친히 5도의 장군들과 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242년 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안평대전이다.(서안평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8254 참조)
애초에 위나라 사마의가 공손연의 요동을 빼앗고는 서안평으로 자신의 주력을 옮겨 동쪽 고구리를 도모하려 했는데, 고구리가 미리 진군하니 그곳의 백성들과 진귀한 보물들이 모두 고구리의 소유가 되었다. 위기를 느낀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리를 침략해온다. 과연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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