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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와 위나라 사이에서 3대에 걸쳐 50년 동안 독자세력을 구축했던 공손씨는 결국은 고구리의 도움을 받은 위나라의 공격에 의해 238년에 멸망하고 만다.
중화사대사상에 찌든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공손씨의 세력까지 한반도 한사군 400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나라를 계승한 위나라가 공손씨를 공격해 멸망시켰는데, 본국에서 자기네 식민지 총독을 공격해 멸망시킬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천태왕 13년(239) 당시 위나라에서는 조조의 손자 조예가 죽고 사마의(司馬懿)가 조상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지목되었으나 조상에게 실권을 빼앗겼었다. 이후 사마의는 어린 3대 왕 조방의 즉위 10년이 지나서야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등을 주살하고는 전격적으로 정권을 휘어잡는다.
사마의는 일명 사마중달로 소설 삼국연의에서 유래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쫒아낸다(死諸葛走生中達)’는 내용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문구는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을 내려 만든 목상을 보고 사마중달이 제갈량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으로 오해해 퇴각을 명령했다는 소설 속에 나오는 유명한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의 장남 사마사(師)는 254년 자신을 주살하려던 조방을 몰아내고 조모를 옹립하고, 260년 차남 사마소(昭)는 자신을 토벌하려던 조모를 죽이고 조환을 옹립했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炎)에 이르러 조환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고는 진(晉)나라를 세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에게 왕위를 빼앗아 위나라를 세운지 45년 만에 위나라는 똑같은 방법으로 망하고 만 것이다.
▲ 제갈량의 목각인형을 보고 놀라 기겁하는 사마중달. 소설 삼국연의에 나오는 허구의 이야기다. <사진=필자제공>
중화사대주의에 입각한 <삼국사기>의 이상한 기록
상호동맹에 의해 공손씨가 멸망하면 요동을 당연히 원래 주인인 고구리에게 돌려주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자, 대노한 동천태왕이 친히 5도의 장군들과 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해 242년 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차지해버린다. 이를 ‘안평대전’이라 부른다.
애초에 위나라는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 서안평으로 주력부대를 옮겨 동쪽에 있는 고구리를 도모하려 했는데, 동천태왕이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는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을 미리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리를 침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동천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자 이상한 기록을 남겼다. “신하 득래가 태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으나 태왕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단식으로 굶어죽었다. 나중에 관구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화사대주의에 심취된 후세의 역사가들이 첨가한 기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리사초·략>에는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대제 16년(242) 5월 임금께서 친히 십만 병력으로 서안평을 쳐서 빼앗았다. 그러자 좌보 목능이 요양하고 있다가 병을 무릅쓰고 들어와 “병력을 다 써버리면 큰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힘을 키우면서 때를 기다림만 같지 않습니다”라고 간언하자, 임금은 “국로께서는 요양이나 하시면서 손자나 쓰다듬으시지, 어찌 이처럼 정벌에 간여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목능은 “소신 역시 황가의 후손으로 어찌 가만히 앉아서 폐하가 위험에 빠지시는데도 간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병하실 것 같으면 청컨대 신을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화를 내자 손녀인 잠후가 목능을 억지로 나가게 했다. 이 일로 목능의 병이 심해져 죽었으나, 집안사람들은 감히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 임금이 안평에서 돌아와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목능을 국공 태보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게 하고는 잠후에게 “당신 조부는 충신이었소.”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사기>는 중화사대모화주의에 입각하여 ‘고구리 동천태왕이 감히 중국에게 반하였기에 결국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큰 화를 입은 것이다’라는 이상한 기록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 북한을 위나라 영토로 제멋대로 그렸는데도 아무소리 못하는 한국, 지명이동된 유주 서안평 환도. <이미지=필자제공>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관구검의 고구리 침공
이렇듯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위나라 관구검의 고구리 침략에 대해 중국과 우리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그 이유는 중국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한때나마 고구리를 패망의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치우천왕에게 항복한 이래 약 3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우리민족을 이겨본 적이 없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러한 관구검의 침공에 대한 중국기록인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을 보기로 한다.
“정시(3대왕 조방, 240-248) 중 고구려가 배반해 수차례 침범하자 관구검이 보·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현토에서 출전해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왕 궁(동천태왕)이 보·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양음갈이 연파하자 궁이 패주했다. 관구검은 말이 미끄러지지 않게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여 환도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내고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
(원문)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梁音渴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정시 6년(245)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자 궁이 매구로 달아났다.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해 옥저를 지나 천 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환도산과 불내성에 글자를 새겨 각석기공을 했다. 죽이거나 포로가 모두 8천여 명에 이르렀고, 논공행상으로 제후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원문) 六年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二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溉灌 民賴其利.
또한 <삼국지 삼소제기(조방/조모/조환전)>에는 “정시 7년(246)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을 토벌해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는 기록이 있고,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와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 조>와 <한원(翰苑)>에는 위 <삼국지 관구검열전>과 거의 같은 기록이 있다.
위 중국기록들만 보면 동천태왕이 위나라의 일개 장수 관구검에게 대패해 도망쳐버렸고, 고구리의 도성인 환도(丸都)가 함락당하고 백성 8천명이 목이 베어지거나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당시 고구리는 위나라에게 멸망당해 아마도 사직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고구리는 멸망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환도산성 표지석(위 사진)과 1906년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위 기록들이야말로 중국 특유의 춘추필법의 아래 사필원칙(史筆原則)에 입각해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존화양이 (尊華攘夷) 중화를 높이고 이족은 깎아내린다.
2. 상내약외 (詳內略外) 중국 역사는 상세히 외국 역사는 간단히,
3. 위국휘치 (爲國諱恥) 나라를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환도산성 표지석과 1906년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다음 연재에서는 관구검 침공에 대한 우리의 기록과 비류수의 위치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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