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구리 대진

중화사대주의 상징 ‘종로 동묘(관우)’에 혈세 쓴다

by 고구리역사 2024. 3. 9.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1034

 

스카이데일리, 중화사대주의 상징 ‘종로 동묘(관우)’에 혈세 쓴다

스카이데일리,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전철역인 ‘동묘(東廟)’ 역에는 ...

www.skyedaily.com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전철역인 ‘동묘(東廟)’ 역에는 이상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물 제142호인 동묘라는 건물인데, 전철역을 오가는 행인들에게 “동묘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하고 물으면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인근에서 장사를 오래한 사람들만이 동묘가 누구의 사당인지 알고 있을 뿐이다.
사당 묘(廟)자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분명 동묘는 누군가를 모신 사당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동묘는 과연 누구의 사당일까? 동묘는 중국 촉한의 장수인 관우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혹자는 중국의 장수인 관우의 사당이 왜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동묘는 약소국가인 속국의 비애가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평범한 장수에서 무신으로 둔갑된 관우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민간에서 싹튼 관우신앙이 명나라 때 정치적으로 활용되면서 집집마다 관우를 모실 정도로 활성화되어,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를 전쟁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전까지 동양의 군신(軍神)으로 모셔졌던 치우천황이 동이족이기 때문에, 이를 관우로 대처하기 위해 소설 삼국연의를 썼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 <사진=필자제공>

관제묘가 처음 세워진 사연은 명나라 군대가 임진왜란에 출전해 승리한 원인을 관우의 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관제묘는 명나라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나아가 속국인 조선에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관왕묘가 조선에 최초로 세워진 것은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진린이 울산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에서 요양을 하면서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지방에도 여러 관왕묘가 세워졌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유정이 남원부 동문 밖에 소상과 비석을 세운 남원 관왕묘, 같은 해 명나라 설호신이 돌로 관우의 상을 만들어 봉안했던 안동 관왕묘,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가 소상을 세워 건립한 성주 관왕묘,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고금도에 세운 강진 관왕묘 등이 그것이다.
이어 진린 장군이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에게 “군사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관우신이 나타나 도와주었기에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신종이 내탕금 4000냥과 ‘현령소덕왕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는 친필액자까지 보내면서 관왕묘를 짓도록 강요했다. 동묘는 1599년에 착공해 1602년에 준공되었는데 건축양식까지 중국의 관제묘를 본떠 세워졌다.
 ▲ 명나라 신종의 친필편액과 관우상(위 사진)과 동묘에 있는 촉한의 장수들 <사진=필자제공>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1598) 5월 13일 자에 “오늘은 관왕의 생신이다. 소상과 제구를 갖추어 치제하려 했는데, 임금도 가셔야 된다고 요청했다. 이 관왕묘는 중국에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그 의식이 제사목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 관리가 강요하므로 임금께서 할 수 없이 가서 분향하려고 대가(大駕)를 준비했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행행을 중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관우가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구해주었으니 마땅히 관왕묘에 치제해야 한다는 명나라 관리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그간 제례 규정에도 없는 제사를 지내려 한 것인데 하늘도 통곡했는지 큰 비가 와서 가지 못했다는 기록이다. 선조는 그 다음날 마지못해 관왕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선조가 1569년(선조 2)에 당대의 석학 기대승으로부터 “소설 삼국연의는 무뢰한 자들이 잡된 말을 지어 만든 것으로, 적벽에서 이긴 것 등은 괴상하고 황당한 일과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해 만든 것이므로 마땅히 군주는 이러한 서적을 경계하셔야 합니다”는 진언을 들었다. 그러나 30년이 채 되지 않아 명나라의 강요로 소설에 의해 부풀려진 장수 관우를 군신으로 떠받들고 제사를 지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힘없는 속국의 서러움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숙종 후기에는 관왕묘에 대한 제사를 일시 폐지했다가, 고종 때 다시 회복되면서 서울의 서묘(1902)·북묘(1883)·숭의묘(1903) 등이 세워져 민간신앙으로 활성화되었다. 서울 명륜동에 관성묘, 고종의 후궁 엄상궁이 세웠다는 중구 예장동의 와룡묘, 명성황후의 명을 받은 민간인들에 의해 건립된 강화도의 3개 관제묘, 그 외 영동·전주·여수·완도·김제 등 지방에서도 무속과 연결되면서 다수의 관왕묘가 건립되어 현재까지 총 20여개가 남아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관왕묘는 ‘명나라 황제의 강요에 의해’, 또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속국도 아닌 지금까지도 민간신앙의 차원을 넘어 국민의 혈세를 ‘중국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그들의 영웅을 모시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관우 이전까지 진정한 무신은 치우천황
비록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었던지라 동묘에도 제사를 올리면서도, 우리의 조상이며 진정한 군신인 치우천황에게도 제사를 올렸다. 그 제사의 이름은 둑제(纛祭)로 1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고, 무장들이 임지로 떠나가기 전에 와서 반드시 둑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도 임지로 떠나기 전 제사를 올렸으며, 전투에 나가기 전 둑신에게 제를 올린 적이 있다.
 ▲ 김산호 화백이 그린 치우천황의 모습과 치우천황 이미지를 상징으로 쓴 붉은악마. <자료=필자제공>

고려시대에도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 한양에 치우천황을 배향한 둑신사(纛神祠)와 마제단(禡祭壇)이 도성 안팎에 있어, 군대의 출전 전에 임금이나 고급 관료와 장수들이 참석해 제사를 지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점차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배향하게 됐던 것이다.
옛 천자인 치우천황(蚩尤天)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桓雄)이다.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렸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해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두려워했다. 중국의 황제헌원과 10년 동안 73회를 싸워 번번이 이겼다. 마지막 탁록 전투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조공을 받았다.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맹하고 강함의 조상이라 할지니, (중략) 이로서 태시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우리 선조들은 대대로 치우천황을 군신 또는 무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민족정기를 말살한 일제와 식민사학계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인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의 특명으로 단군을 신화화하고, 우리 삼국의 역사를 반도내로 몰아넣었으며, 민족혼을 자르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뚝섬에 있던 치우천자의 사당 둑신사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사당을 부셔버리고 말 키우는 장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뚝섬경마장이 들어서게 된다.
일제의 이런 짓은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집어넣고, 남산 국사당에 식물원을 만들고, 경희궁을 학교로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행위이다. 모두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묘는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놔두는 것이 우리의 민족혼을 죽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재 동묘는 문화재청의 위탁을 받아 종로구청이 관리하고 있다. 동묘에는 직원 한 명이 낮에만 상주하다 숭례문 화재 이후 24시간 경비하고 있는데 년 1억의 예산이 소요되고 있으며, 문화재청은 10억의 국가예산을 들여 백해무익한 동묘를 보수했다. 아직도 일제식민사학을 계승한 사학계와 문화재청은 중화사대주의를 흠모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어찌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