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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소설 삼국지 명장 실제인물 관우는 ‘고구려인’

by 고구리역사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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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소설 삼국지 명장 실제인물 관우는 ‘고구려인’

스카이데일리,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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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든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다음과 같이 부풀리고 있다.
 
1.술이 채 식기도 전에 동탁의 부장 화웅을 단 칼에 베는 장면 (화웅은 손견에게 죽음)
 2. 원소의 맹장 문추의 목을 베는 장면 (문추는 조조군의 화살에 죽음) 
3. 조조에게서 떠나 유비를 찾아가면서 오관의 장수들을 참하는 장면 (완전 허구) 
4. 적벽에서 대패해 도망가는 조조를 화룡도에서 살려 보내는 장면 (완전 허구)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는 관우의 무공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없음에도,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가 많은 무공을 세우고 의리 있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명장으로 묘사해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되었다. 그러나 실제 관우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될 정도의 장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관우는 조조에게 패해 사로잡힌 적이 있고, 동오와의 전쟁에서 여몽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린 패장이었기 때문이다.
 
관우가 군신·무신으로 추앙된 이유는 관우를 생포한 동오의 사령관 여몽과 부사령관 손호가 얼마 후에 갑자기 죽고, 관우의 목을 본 조조까지 이듬해 66세의 나이로 죽자 사람들은 관우의 원혼이 저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일개 무장이었던 관우를 황제로 받들어 제사를 모신 것은 백성들의 동정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 관우의 고향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는 관제묘(사진 아래)에 서있는 68m 짜리 관우의 동상. <사진=필자제공>
 
관우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서는 “관우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일예로 손권이 자기 아들과 관우의 딸과의 혼인을 제의했을 때 관우는 크게 노하며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 수 없다”며 거절하면서 손권의 사자를 꾸짖어 돌려보낸 적이 있다. 이처럼 관우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인물이었다.
 
원래 강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는 단점이 있는 법이다. 강릉에 있던 촉한의 태수 미방과 부사인은 관우에게 무시를 당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어 군수물자 조달에 비협조적이었다. 이에 대해 관우는 “개선한 후 치죄하겠노라”라고 경고하고는 일단 전선으로 떠나간다. 결국 그들은 오나라가 강릉을 공략하자 촉한을 배반하게 되고, 군수지원을 받지 못한 관우는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혀 목이 잘려지게 된다.
 
사돈을 맺자는 손권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심한 말을 내뱉어 손권을 격노하게 만든 것은 커다란 외교적 실수이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불만이나 공포심을 가지게 만든 것은 내정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관우의 죽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 형주에서 성도로 돌아오면서 관우에게 “동쪽으로는 손권과 화친하고, 북쪽으로 조조를 막아야 한다”는 향후 기본전략을 제시했다. 이러한 기본전략을 제대로 지켰더라면 관우는 오나라 여몽에게 사로잡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관우가 성격적 결함이 있는데다가 상사의 충고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말인 것이다.
 ▲ 드라마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여몽군에게 낙마되어 생포되는 장면. 이런 관우가 군신이 될 수는 없다. <사진=필자제공>

 
소설에 여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관우가 실제로는 미인을 무척 탐했다는 사실은 송·원대 구비문학에서 종종 등장한다. 소설 삼국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인 10명을 보낸다. 그러나 관우는 이 미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오직 인질로 잡혀 있는 유비의 두 부인을 섬기는데 전념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와 유비가 여포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합비성으로 갈 때, 관우는 상대 장수의 부인인 두(杜)씨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성을 함락시키면 그 여자를 제게 주십시오”라고 조조에게 간청한다. 조조는 흔쾌히 수락했으나, 함락 후 실제로 경국지색인 두씨를 보고는 마음이 변해 관우와의 약속을 깨고는 자신의 첩으로 삼아 버린다. 이에 앙심을 품은 관우가 이후 조조를 죽이려고 하는 등 심한 갈등을 겪는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이러한 관우의 치부를 감추고 그를 마치 천하무적의 전쟁영웅으로 묘사해 정사를 모르고 소설만을 읽은 사람들은 관우를 매우 인간적이고 대단한 장군으로 알고 있으며, 이러한 허구의 역사소설이 한국인의 교양필독서로 읽히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하겠다. 더욱이 이러한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삼국연의의 주인공 관우는 원래 고구리(고구려) 출신
 
그런데 소설 삼국연의에 의해 과대포장된 관우는 원래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구리(高句麗)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관우는 하동 해현 출신으로 망명해 탁군으로 달아났다 (关羽字云长,本字长生,河东解人也。亡命奔涿郡)”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관우의 출신지인 하동 해현이란 글자 그대로 황하의 동쪽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관우는 160년에 태어나 고향에서 큰 죄를 짓고는 쫓기는 몸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한나라로 망명(亡命)을 해 유비가 살고 있던 탁군(涿郡)으로 가게 된다. 관우가 망명을 해 한나라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관우가 원래 한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망명이라는 단어의 뜻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다움 백과사전) 망명 : (1) 정치, 사상, 종교 등의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탄압이나 위협을 받는 사람이 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 (예문) 단재 신채호 선생은 결국 망명을 했다.
(2)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몸을 숨겨 멀리 도망가는 것.
 
(네이버 백과사전 ) 망명 :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외국에 도피해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 망명은 단순히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한 난민과는 구별된다.
 
위 <백과사전>에서 보듯이, 관우는 원래 한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말은 관우의 고향 하동 해현이 한나라 땅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은 것으로, 당시 하동 해현 즉 지금의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일대는 분명히 고구리 땅이었다. 왜냐하면 배달국과 조선의 핵심강역도 산서성이었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가 이를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력이 약했을 때는 유주를 중국에게 잠시 내준 경우도 있으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산서성 남부 운성이 고향인 관우가 국경을 넘어 망명한 한나라 땅 탁군(涿郡)은 나중에 범양군(范陽郡)으로 이름이 바뀐다. 범양군은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이 다스린 13명 태수 중 하나인 범양내사로 지역은 황하 남부 정주시 부근 또는 범현으로 추정된다. 광개토태왕 때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에 황하남부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 관우의 망명으로 본 산서성 남부는 당시 고구리의 유주 . <이미지=필자제공>

 
관우 망명 전후의 고구리와 한나라와의 전쟁
 
관우가 한나라로 망명하기 전후의 고구리와 한나라의 전쟁 상황은 아래와 같다.
 
관우가 18살 때인 172년, <삼국사기>에 “신대왕 8년 한나라가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려 마침내 돌아가므로, 명림답부는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추격하였다. 좌원에서 싸워 한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리고 한 필의 말도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침범한 한나라 대군이 100% 몰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우가 24살 때인 184년, “고국천왕 6년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왕은 왕자 계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므로, 왕이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와 싸워 무너뜨림과 동시에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 이렇듯 참패한 한나라가 어떻게 유주(산서성 남부)를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관우가 망명할 즈음 한나라에서는 황건적이 난(184~204)이 일어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 19년(197)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니 한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몰려와서 의탁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구리사초·략>에는 “투항해 오는 한나라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에 관리를 두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직책도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서로 가까웠다는 증거다.
 
 ▲ 광개토태왕 시절 고구리 영토. <이미지=필자제공>

 
많은 한나라 사람들이 황건적의 난을 피해 고구리로 피신하고 있을 때, 오히려 관우는 반대로 고구리에서 한나라로 망명했다. 관우의 출신지와 망명이라는 기록으로 보면 관우는 분명 고구리 사람일 수밖에 없었고, 고대 중국의 강역은 생각보다 작았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대륙을 서울시에 비유한다면 고대 중국은 중구 일대였고 그 나머지는 우리 민족이 활동하던 무대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