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9960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든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백미가 바로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한 적벽대전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적벽대전의 내용은 지난 연재에서(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9604) 소개한 바 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은 그야말로 허구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된 당시의 상황은 208년 겨울 조조의 100만 대군이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남진했다가 유비·손권의 10만 연합군에게 적벽에서 대패하는데, 방통이 연환계로 조조의 선단을 묶어두고 제갈량이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불게 해 화공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전멸시키고 도망가던 조조가 화룡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조조가 적벽에서 100만 대군을 일순간에 잃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얼마 후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또 공격해 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조의 괴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실제 있었던 괴력이 아니라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고구리와의 전쟁에서 113만 대군을 동원했던 수나라는 전쟁에서 패하자 민심이 떠나가고 군웅들이 일어나 얼마 후 당나라 이연에게 망하고 만다. 하물며 통일왕국 수나라도 이러했거늘 중국이 셋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이 한방에 몰살당했음에도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소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삼국의 인구수는 위나라가 66만호로 인구 약 400만 명, 손권의 동오가 52만호로 인구 약 300만 명, 유비의 촉한이 28만호로 인구 약 170만 명이다. 전체 인구 중 여성이 절반이고 노인과 미성년자가 2/3가 넘을 것이니, 국가가 산업경제를 유지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젊은 남자는 아마 5% 내외일 것이다.
▲ 이런 좁은 지형에서는 100만 대군이 뒤엉켜 전투할 수가 없다. <사진=필자제공>
따라서 조조가 66만호의 인구에서 백만 군사를 동원해 적벽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은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로 그야말로 과장 중에서도 과장인 것이다. 또 백만 명이 몰살당했다면 산업에 종사할 젊은이가 거의 없어졌을 텐데 국가경제가 이상 없이 돌아갔고, 민란 한 번 없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게다가 상대방의 군사가 채 10만도 되지 않는데, 조조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했을 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적벽은 양자강 중류 호북성의 성도 무한시 서쪽에 있는데 강폭이 한반도에 있는 한강 중류만큼 좁기 때문에 그런 지형에서는 100만 대군이 뒤엉켜 대형전투를 벌일 수가 없다. 특히 조조의 100만 수군의 수많은 배들을 배치시키기에는 턱없이 좁은 지형이며, 게다가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제대로 안보여 화살 10만개를 마구 날릴 정도로 넓은 강폭이 아니다.
그리고 소설에는 수전에 약한 조조의 군사들이 배멀미를 심하게 해 방통이 알려준 계략(연환계)대로 모든 배들을 서로 묶었다고 하는데, 양자강 중류 적벽은 배가 울렁거릴 정도로 강폭이 넓은 곳이 아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마치 적벽대전이 황해바다 입구인 양자강 하류에서 일어난 전투처럼 느껴지도록 묘사한 것이다.
제갈량은 신출귀몰한 군사전략가가 아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안개 자욱한 날 적 진영에 접근해 조조군이 쏜 화살 10만개를 구해오고, 하늘에 제사를 올려 동남풍을 불어오게 하고는 휘하 장수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작전지시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완전히 허구이다. 왜냐하면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그를 신출귀몰한 군사전략가가 아니라 유능한 행정가인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 소설 내용대로 그린 중국 CCTV의 제갈량(2012.10월 방영)
정사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행했다. 그리하여 촉한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군사를 동원했으면서도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군사전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평했다.
제갈량은 내치(內治)에서는 관중과 소하에 비유될 정도였다. 특히 그가 승상으로 있을 때 촉한의 경제가 크게 성장한 것으로 보아 경제정책의 수립과 운용에 매우 유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끔 출전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기본기와 정공법을 중시한 지휘관이었을 뿐,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된 신출귀몰한 책략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주로 행정과 병참지원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은 유비가 형남 4군을 정벌할 때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행정과 병참을 담당했고, 219년 유비와 조조간의 일생일대의 격전인 한중공방전이 벌어졌을 때에도 제갈량은 성도에 있으면서 병참과 보급을 담당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이 전쟁에서 제갈량이 갖가지 신묘한 계책으로 조조군을 격파한 군사(軍師)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 당시 유비를 수행한 작전참모는 법정과 황권이었다.
제갈량은 동남풍을 불러온 적이 없다
방통이 연환계를 써서 조조군의 배들을 모두 묶어놓고 주유가 고육계를 써서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하는 계략을 만들어놓고는,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어오게 해 화공으로 조조의 배들을 모두 불태우고 백만 대군을 전멸시켰다는 삼국연의의 이야기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그 여부의 확인을 위해 정사 <삼국지>의 여러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 억지 춘향식으로 설명한 한 기상학자의 적벽에서의 바람 방향.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는 적벽 전투에 대해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으나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가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고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지 오서 주유전>에는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했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조조)의 군대가 패퇴해 강북으로 후퇴했다”는 기록이 있어 조조의 후퇴는 백만 대군과 배들을 모두 잃어서가 아니라 당시 조조의 군영에 심한 역병이 돌고 있어 어쩔 수없이 퇴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는 “주유와 정보가 좌·우 도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는 “손권이 주유·정보와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들을 토대로 적벽에서의 전투상황을 분석해 본다면 조조가 적벽에 도착했을 때 진영에 심한 역병이 돌았고, 그런 상태에서 임한 초기전투에서 조조가 유비·손권의 연합군에게 패하자 남은 배를 스스로 불태우고 퇴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연합군이 조조의 선단을 모두 불태우고 백만 대군을 몰살시킨 것으로 각색한 것이다. 조조가 퇴각하면서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한 사실도 물론 정사 <삼국지>에는 없다.
▲ 소설의 내용대로 제작된 중국 영화 적벽의 포스터.
위·오·촉은 후한이 망하고 서진(西晉)으로 통일되기 전까지 잠시 존재한 나라들이었다. 위나라가 45년, 촉한이 42년, 동오가 58년 존재해 인간의 수명보다도 짧은 존속기간을 영유한 보잘것 없는 나라들이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문화의 창달과 과학기술의 함양은 꿈도 못 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만을 일삼다 망해버린 나라를 과연 진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지?
거기에 비하면 우리 민족의 나라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국명/존속기간)
환국/3301년, 배달국/1565년, 조선/2096년, 고구리(북부여 포함)/900년, 백제/678년, 신라/992년, 대진국(발해)/229년, 고려/475년, 조선/51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여기에 요나라(거란)/209년 + 금나라(여진)/119년 + 원나라(몽골)/97년 + 청나라(여진)/295년이 우리와 동족(同族)의 역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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