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 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어낸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고 있다. 과연 어떠한 내용들이 있는지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다.
<전 칼럼에서 계속> 6) 원소의 맹장 안량이 관우에게 어이없이 당하자, 이번에는 안량의 의형제격인 문추가 원수를 갚기 위해 출전한다. 소설 삼국연의에 따르면, 문추가 공격해오자 조조 휘하의 장료와 서황이 출전한다. 문추는 두 장수가 포위하는 것을 보고는 화살을 쏘아 장료의 투구 끈을 맞춰 떨어뜨리고, 다시 다가가던 장료가 타고 있던 말이 문추가 쏜 화살에 맞아 낙마하고 만다.
장료가 위험해지자 서황이 급히 나서서 구해주고는 문추와 몇 회합을 겨루었으나 힘에 부치자 도망치고 만다. 문추가 병력을 이끌고 서황을 추격할 때 관우가 중간에 나타나 문추를 가로막는다. 문추는 관우와 응전했지만 채 2합도 되지 않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겁을 먹고는 말을 돌려 도망친다. 관우는 빠른 적토마로 달려가 머리 뒤에서 문추를 내리쳐 말에서 떨어뜨린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의 기록은 다르다. 안량이 전사하자 원소는 기병대장 문추를 유비와 함께 조조 진영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군수물자를 미끼로 문추를 유인했고, 문추의 군사들이 군수물자를 얻느라고 흩어지자 진영이 어지러워졌다. 이때 조조가 6백 기병을 거느리고 문추군을 공격해 대파했으며 문추도 혼전 중에 전사했다.
이 장면 역시 촉한의 장수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조 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해 효수당한 문추의 목을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달려가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도망가는 문추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고 달리 묘사했던 것이다. 즉 이 장면은 완전 허구인 것이다.
7) 관도대전 이후 유비의 편지를 받은 관우는 조조에게서 떠나 유비에게 가기로 결심한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고 유비에게 가는 도중 5개의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차례로 단칼에 베면서 돌파하는 장면을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고 한다. 유명한 고사성어로 불리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없고 나관중이 각색해 지어낸 부분이다.
▲ 도망가는 문추를 뒤에서 내려치는 관우. <이미지=필자제공>
관우는 낙양으로 가는 관문인 동령관에서 증명서를 요구하는 공수를 단칼에 베고, 낙양을 지키던 태수 한복과 맹탄을 죽이며, 사수관의 진국사에서는 자객들을 모두 죽이고 수문장 변희마저 죽인다. 형양에서는 태수 왕식을 단칼에 베고, 마지막 관문인 활주관에서는 하후돈의 부하 진기를 베고는 배를 구해 황하를 건너게 된다.
유비에게로 가는 도중 관우는 고성을 지키고 있던 장비를 만난다. 장비는 관우를 조조의 부하로 오해해 장팔사모를 휘두르나, 관우가 조조의 장수를 베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자 오해를 푼다. 유비는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를 설득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어 관우를 만나게 되고, 조운(자룡)을 얻고 여러 장수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소설에는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는 없는 내용으로 허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관우가 주군 유비를 만나기 위해 조조의 곁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조조는 사로잡은 관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주며 자신의 부하가 되기를 회유하나, 그럴 때마다 관우는 "조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고,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해 양무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날 때 조조가 내린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유비에게로 향했다. 조조의 측근이 추격하려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라’고 타이르며 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소설의 내용과 같은 오관참육장과 같은 불상사는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소설에서처럼 관우가 5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조조 휘하의 수문장들을 모조리 참살하려 했다면 조조가 그를 조용히 보내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강한 장수와 병사를 보내 자신의 장수들의 목을 벤 관우를 응징했을 것이 당연하다. 즉, 오관참장은 나관중이 지어낸 100% 허구의 소설 속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 관우를 의리의 대명사로 만든 허구의 오관육참장. <사진=필자제공>
8)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는 뛰어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몸소 누추한 곳이라도 찾아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소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은 유비가 찾아올 때마다 일부러 자리를 피했으나 3번이나 찾아오는 정성을 받아들여 유비를 돕기로 결심해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비는 서서의 추천으로 제갈량을 만나러 간다. 처음 가을에 찾아갔으나 동자만이 있었으며 제갈량이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겨울에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제갈량을 못 보고 그의 친구들과 장인과 아우만 보고 왔으며, 이듬해 봄에 찾아가자 마침 제갈량이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깨기를 기다린다. 그러자 동행했던 장비가 화를 내며 집에 불을 지르려 했고, 결국은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 촉서 유비전>에서는 이러한 삼고초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제갈량전>에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며 ‘그 사람은 이쪽에서 만나러 가야하며, 불러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부디 장군께서 몸소 가셔서 대면하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유비가 몸소 가서 세 번째에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제갈량도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선제께서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모옥을 방문하시어 천하형세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에 감격해 선제를 모실 것을 맹세했습니다"라는 언급이 있어 세 번이나 제갈량의 초옥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나 소설 속의 내용은 과장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위략>에서는 "제갈량은 형주가 조조에게 공격받는다면, 유표로서는 버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북상해 번성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 뵈었다. 하지만 유비는 당시에 제갈량을 몰랐고, 그가 젊다는 것을 보고 그저 식객이 되기를 원하는 정도로 생각해 특별히 말을 걸지도 않았다" 는 기록이 있어 소설 속의 삼고초려 내용은 과장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 세 번이나 찾아온 정성에 감동해 유비를 만나 천하형세에 대해 설명하는 제갈량. <이미지=필자제공>
9) 조조가 100만 대군으로 유비를 장판까지 추격해오자 다급해진 유비는 도망가면서 장비에게 20명의 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지시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장비가 숲속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먼지를 일으켜 복병이 많은 것으로 위장했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장비는 장판교 위에 필마단기로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라고 호령한다.
장비의 고함소리에 조조의 장수 하후걸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낙마하고 장비에게 덤비다 죽임을 당하자 조조군은 추격을 멈추고 돌아간다. 덕분에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고, 이후 장비가 다리를 불태워 끊어버린 것을 알고는 조조군은 유비의 사정이 급박함을 알고는 다리를 다시 만들어 추격을 개시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는 장비가 고함을 질렀다는 기록은 없고, “물가에 다리를 끊고 20기만 앞에 있자 물러났다”고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조의 장수는 하후패였는데, 삼국연의에서는 하후패가 훗날 촉한에 귀순해 촉한을 위해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그가 낙마한 것이 아니라 하후걸이라는 가상의 장수가 낙마한 것으로 묘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기대승이 “지난번 (전하께서) 장필무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연의에 있다고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않아 소신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는 것으로 보아 장판교에서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적장이 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이었던 것이다.
▲ 장비가 장판교 위에서 고함을 지르자 하후걸이 낙마하는 그림. <이미지=필자제공>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관우가 문추를 죽이고, 유비를 만나러 가면서 5개 관문의 수문장을 참했다는 오관육참장은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없는 허구 그 자체이다. 장판교에서의 장비의 고함에 적장이 낙마하고 죽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인 것이다. 이렇듯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소설 삼국연의의 크라이막스는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인 것이다.
<삼국지의 허구/다음 칼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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