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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를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 때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고 있다. 과연 어떠한 내용들인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탁군에서 돗자리 장사를 하던 유비와 푸줏간을 하던 장비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관우가 만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며 나이순으로 의형제를 맺어 유비가 첫째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관우가 160년생이고 유비는 161년생으로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더 많다. 따라서 나이순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허구인 것이다.
또한 도원결의는 정사 <삼국지>에 없는 허구이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유비가 고향에서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잠자며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면서 적과 싸우는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세 명은 의형제가 아니라 침상을 같이 쓸 정도로 친밀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였던 것이다.
2) 도원결의를 맺은 3인은 대장간으로 가서 유비가 쌍칼, 관우가 82근 청룡언월도, 장비가 장팔사모라는 무기를 의뢰해 사용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82근이면 약 18kg이 넘는 무게인데, 그 언월도를 관우가 자유자재로 휘둘렀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든다.
▲ 중국 곳곳에 있는 허구의 도원결의 기념물. <사진=필자제공>
관우가 사용한 무기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에 2군데 간단한 언급이 있다. 첫째 관우가 안량을 찔러 죽였고, 둘째 노숙과의 만남에서 칼을 들고 일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조 양나라 때의 <고금도금록>에는 “관우가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 두 자루를 만들고 만인적(萬人敵)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전투에 패해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속에 던졌다"라는 기록이 있어 관우의 주 무기는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바로 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여포가 방천화극(方天畵戟)을 휘둘렀고 장비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다. <중국병기사고>에 "한나라 때는 극(戟)의 제작이 성행하였고, 모(矛)가 그 다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한서>나 <삼국지>에도 언월도처럼 긴 자루가 달린 대도(大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한나라지에서도 대도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
중국 기록에 언월도(偃月刀)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며, 언월도는 북방민족의 무기로 소개하고 있다. 나관중이 소설 <삼국연의>를 쓰면서 관우에게 청룡언월도를 쥐어준 것은 그가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언월도뿐만 아니라 청룡은 동쪽의 수호신으로 동이(東夷) 즉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방천화극을 든 여포를 공격하는 쌍칼의 유비, 청룡언월도의 관우, 장팔사모의 장비. <이미지=필자제공>
3) 원소가 주축이 된 반동탁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여포는 동탁에게 자신이 출전해 연합군을 상대하겠다고 제의하나, 화웅이 연합군을 막는 데는 자신 정도로도 충분하다면서 출전하기를 청한다. 화웅에게 연합군의 포충, 손견의 수하 조무, 원술의 부장 유섭, 한복의 부하 반봉 등이 당하자 연합군에서는 아무도 선봉으로 나서길 꺼려했다. 이를 지켜보던 관우가 출전해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단 1합 만에 베고 돌아왔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는 연합군의 일원인 손견이 양인에 도착하자, 동탁은 호진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감독하게 해 손견과 맞서게 했다. 화웅은 도독에 임명돼 호진의 부장으로 출전했다. 양인 전투에서 손견이 동탁의 군사를 크게 쳐부수고 화웅은 화살에 맞아 죽어 효수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화웅은 관우에게 단칼에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단번에 벤 화웅의 목을 가져와 보여주는 관우. <사진=필자제공>
4) 정권을 잡은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해 폭정을 계속하자, 왕윤은 자신의 수양딸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과 수양아들 여포를 이간질해 두 사람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여포가 동탁을 죽일 결심을 굳히자, 왕윤은 동탁에게 사람을 보내 헌제가 선양하려 하니 궁궐로 들어오게 해 여포가 동탁을 죽였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왕윤이 동탁을 암살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일이 들통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여포가 평소 잘 대해주던 왕윤을 찾아가 이에 대해 상의하자, 왕윤은 동탁 암살계획을 이야기하고 여포에게 가담할 것을 권유해 결심을 받는다. 헌제를 위한 잔치가 열리자 왕윤은 동탁을 주살하라는 거짓조서를 여포에게 주어 궁궐로 들어오던 동탁을 죽이게 했다.
여포가 양아버지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것을 왕윤의 수양딸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으로 바꾸어 묘사했는데, 이 가공의 인물인 초선(貂蟬)은 양귀비, 서시, 왕소군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4대 고대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을 봐도 중국의 역사는 가공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중국 고대 4대미인. (좌로부터) 양귀비, 초선, 서시, 왕소군 <이미지=필자제공>
5) 반동탁 연합군을 이끌었던 조조와 원소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원소의 부장인 맹장 안량이 조조의 부장 송헌과 위속을 단칼에 죽이고는 서황마저 30합 만에 격퇴시키자 다급해진 조조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관우를 출전시켰다. 관우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 적토마를 타고가 안량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여포의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적토마는 관우가 패해 생포되자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토마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적토마를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해볼 때 그때까지 오래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원소의 부장 안량이 조조 휘하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자 조조가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한다. 관우가 멀리 있는 안량의 군기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관우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인 것은 사실이나,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조의 부장들을 압도적으로 이긴 안량을 관우가 단번에 베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의 맹장 안량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연이 숨어있었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의 무공을 높이 평가해 죽이지 않고 편장군에 임명하고 후히 대접했으나, 관우는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공을 세워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갚은 후 여기를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 무방비상태의 안량을 기습해 목을 베는 관우. <이미지=필자제공>
당시 관우가 조조 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비가 원소에게 “관우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 우리 편으로 올 것이다"라고 말하자, 원소는 안량에게 관우를 보면 공격하지 말고 유비의 말을 전하라고 명했다. 안량은 관우를 보자 반갑다고 인사하며 뭔가 말하려는데 관우가 무방비상태에 있는 안량을 기습해 찔러 죽이고는 그 목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삼국지의 허구/다음 칼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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