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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희대의 가짜 ‘나관중 삼국지’에 한민족 역사 왜곡

by 고구리역사 2024. 3. 7.
213년 고구리 산상태왕은 주통촌의 소후에게서 얻은 아들 교체(동천태왕)를 태자로 책봉한다. 그리고는 얼마 후 고구리 주변의 국제정세는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된다. 한나라에서는 헌제를 옹립했던 조조가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제위까지 넘볼 수 있는 최고 권력을 쥐게 되었으나,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그러던 조조가 220년에 죽고 9개월 후 아들 조비는 헌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해 황제가 되어 위(魏)나라라 칭했다. 중국의 상징 한나라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이듬해 한 왕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촉(蜀)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했고, 229년 손권이 오(吳)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드디어 중국에서는 후한이 나뉘어져 위·오·촉의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조비가 세운 위나라는 45년 후인 265년 사마의(중달)의 손자 사마염에게 왕위가 넘어가 진나라가 세워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서진(西晉)이라 한다. 유비가 세운 촉한은 42년 후인 263년 아들 유선이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항복하고, 손권의 오는 51년 후인 280년 사마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위·오·촉 삼국 모두 인간의 수명보다도 짧은 초미니 집단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 중국의 삼국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 민족의 나라들은 고구리가 900년, 백제 678년, 신라 992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렇듯 인간의 수명보다도 짧은 역사 속에서 어찌 문화의 창달과 사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리오! 오로지 서로 속이고 죽고 죽이고 하는 무질서 속에서 황금만능의 혼탁한 세상만이 중국에 존재했던 것이다.
 ▲ 한나라 헌제를 끌어내리고 황제가 된 위나라 문제 조비. <사진=필자제공>
 
수의 <삼국지>는 황건의 봉기부터 후한이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서진으로 통일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서로 위서 30권, 촉서 15권, 오서 20권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기>나 <한서>처럼 인물위주로 씌어졌으나 연표를 담은 표(表)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는 없고, 단대사(斷代史)를 나라별로 저술해 새로운 형식의 사체(史体)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보고 쓴 역사서이다. 위나라 왕들을 본기로 했으며 촉과 오의 왕들은 열전에 편입시켰다.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라 기록했고, 오의 왕들은 주를 붙이거나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진수가 살던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선위를 받아 세워졌기 때문이다.
정사로 둔갑한 소설 ‘삼국연의’
우리나라에서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중에서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판매되고 있는 책인데, 그 내용은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와는 많이 다르다. 한국의 삼국지는 명나라 초 천재소설가 나관중이 지은 ‘삼국연의’의 내용을 번역한 책이다. 연의(演義)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에 내용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책이나 창극’이라는 뜻이다.
 ▲ 중국에서는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를 구별해서 팔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사진=필자제공>

 ▲ 우리나라에서는 소설 삼국지가  마치 정사로 오인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미지=필자제공>
 
 
나관중은 삼국연의의 앞머리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기록을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청나라 역사가 장학성은 “칠실삼허(열 중 일곱은 사실이고 셋은 허구)”라고 했듯이 오리지널인 정사 <삼국지>가 없었다면 소설 삼국연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국연의는 만화로도 그려지고 전집류로 팔리고 있는데, 독자가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소설의 내용을 정사(正史)로 오인해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사실 문제가 많은 책이다. 앞으로는 소설 삼국연의를 읽으면서 ‘주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허구’라는 개념을 갖고 읽어야 소설로 인해 사라져버린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관중은 원말명초 시기를 살았기에 한족이 이민족인 몽골에게 지배당한 현실을 비통해 했고 명나라는 이러한 한족들의 추락된 사기를 진작시키고, ‘동이역사의 말살’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년 전에 사라진 한족이 세운 촉한을 이상형으로 삼아 소설로 각색하도록 했다. 즉, 소설 삼국연의는 한족의 정통성을 기치로 내걸고자 유비의 ‘촉한 정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삼국연의는 ‘촉한 정통’의 기준에 따라 촉한의 인물들을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반면에 <위서 동탁전>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개혁가로 기록된 동탁은 중국의 변방인 롱서 임조(陇西临洮)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설에서는 희대의 패륜아로 매도되고 양아들인 여포에게 공격받아 죽는 한심하고 못난 인간으로 묘사돼 있다.
건안문단을 선도한 시인이자 문학과 사상의 진흥에 앞장서 정사 <삼국지>에 ‘문치의 제왕’으로 기록된 조조가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하고 교활한 간웅(奸雄)으로 탈바꿈되고, 유능한 정치가이기는 했지만 군사는 잘 쓰지 못했던 촉한의 제갈량이 신출귀몰한 군사전략가로 변신한 데에는 이러한 ‘촉한 정통’이라는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 삼국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관우가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베고 문추를 단칼에 죽이는 장면과 오관참장, 왕윤이 초선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장면,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 장비가 장판교에서 고함 한마디로 적장을 죽이고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러들여 화공으로 조조가 100만 대군을 잃는 내용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 삼국연의를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조조와 위나라는 계속 패전만 거듭하고 유비의 촉한이 자주 이기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국의 통일은 당연히 촉한에 의해 이루어졌어야함에도, 실제로 삼국은 나중에 위나라를 이은 서진에 의해 통일된다. 그 이유는 바로 삼국연의가 소설 속의 허구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명나라는 위·오·촉의 역사를 마치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과대포장하여 당시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소설 삼국연의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정작 피해자인 한국인들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마치 실제로 일어난 역사인양 착각하고 있으며, 그 소설에 매료되고 환호하는 이 슬픈 현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정신을 죽이는 소설 삼국연의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팔리면 안 되고, 적벽대전과 같은 영화도 상영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역사에 대한 무지함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올바른 역사의 진실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동탁의 고향 롱서는 어디인가?
정사 <삼국지>에 동탁은 롱서군 임조현(陇西临洮)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조는 <사기 몽염열전>에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 장군과 30만 명을 보내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 여리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참조칼럼)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634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롱서군에는 수양현과 임조현 등 11개현이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陇西郡 롱서군) 秦置。莽白厌戎。户五万三千九百六十四,口二十三万六千八百二十四,有铁官、盐官。县十一:狄道(적도),白石山在东。莽曰操虏。上邦,安故,氏道,《禹贡》养水所出,至武都为汉。莽曰亭道。首阳(수양),《禹贡》鸟鼠同穴山在西南,渭水所出,东至船司空入河,过郡四,行千八百七十里,雍州浸。予道,莽曰德道。大夏,莽曰顺夏。羌道,羌水出塞外,南至阴平入白水,过郡三,行六百里。襄武(양무),莽曰相桓。临洮(임조),洮水出西羌中,北至枹罕东入河。《禹贡》西顷山在县西,南部都尉治也。西。《禹贡》嶓冢山,西汉所出,南入广汉白水,东南至江州入江,过郡四,行二千七百六十里。莽曰西治。
중국은 동탁의 고향인 임조를 중국의 변방이라는 표현을 쓰며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지명이동을 통한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롱서가 어디인지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61 백이열전>에 붙인 후대 학자들의 주를 보면 알 수 있다.
1)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같은 기록에 전하길, “롱서군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라는 기록이 있으며,
2) <집해>에서 마약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
3) 허신의 <설문>에 전하기를,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說文云首陽山在遼西)”는 기록이 있다.
 ▲ 대청광여도(위 지도)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무덤(아래 사진)이 2002년 실제로 발견됐다. 이곳이 원래 롱서이고 요서다. 

위 세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롱서이고, 그곳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동쪽으로 90도 꺾이는 코너인 산서성 서남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이·숙제의 무덤은 <대청광여도> 등 고지도에도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2002년 그곳에서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이 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바로 그곳이 고대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경계였던 진장성의 서쪽 끝인 임조(=롱서=적조)이고, 고구리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가끔 중국에게 빼앗기기는 했으나 줄곧 우리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곳 롱서 출신 동탁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동 해현(河東解縣) 출신 관우는 고구리 사람으로 한나라에 들어가 활약한 역사인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