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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중국 황하 서쪽(서하)도 고구려 초 강역이었다

by 고구리역사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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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중국 황하서쪽(서하)도 고구려 초 강역이었다

스카이데일리, 고국천왕에 의해 시골농사꾼에서 일약 국상으로 발탁돼 진대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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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에 의해 시골농사꾼에서 일약 국상으로 발탁돼 진대법을 실시해 빈민을 구제한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붕어 후 적형 발기가 서출 동생 산상왕(연우)에게 넘어간 보위를 놓고 다툼을 슬기롭게 정리해 나라의 사직을 굳건히 한다. 비록 우황후의 농간이 있기는 했으나 산상태왕이 보위에 오르는 것이 국가를 위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역적 발기의 반란을 지원하는 척했던 요동태수 공손도의 아들이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 방비가 튼튼할 것이므로 깊숙이 들어가 치는 것은 가당치 않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을파소는 당시 훌륭한 국상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는 5년 후에 다음 태왕이 태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미래통찰력까지 겸비했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을파소의 죽음과 그의 미래통찰력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산상왕 7년(203)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자 15일 밤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신하들에게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했는데, 내게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을파소는 “천명이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려 보소서”라고 말했다. 그 해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백성이 통곡하며 슬퍼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매사에는 그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명재상 을파소는 5년 후의 일을 미리 알았던 선인이었던 것이다. 5년 후에 일의 사연이란 다음과 같다.
 ▲ 제물용 돼지. 고대에는 산 돼지를 제물로 사용했다. <사진=필자제공>
 
이듬해 겨울 12월 돼지 한 마리가 빠져나가 달아나니 관리가 그 뒤를 쫓아가다 주통촌(酒桶村)이라는 곳에 이르러 그 돼지가 요리조리 달아나자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름답고 고운 얼굴의 20세가량 된 여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돼지를 붙잡게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이상히 여겨 미행차림으로 밤에 그녀의 집에 당도했다. 
시종을 시켜 말을 전하니 그녀는 왕이 온 것을 알고는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왕이 그녀를 불러 가까이하려 하니 “대왕의 말씀을 감히 어길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천행으로 아이가 생기게 되거든 버리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말하자 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는 그녀와 합방했다. 왕은 자정에 일어나 궁궐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우왕후는 왕이 주통천의 여자와 합방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질투하여 몰래 군사를 보내 여자를 죽이려 했다. 주통천의 여자가 이를 알고는 남장을 하고 달아났으나 곧 붙잡혔다. 군사들이 죽이려 하자 그녀는 “너희들이 와서 지금 하는 짓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아이는 왕의 혈육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좋으나 왕자도 죽이려고 하느냐?”고 말하자 병사들이 감히 죽이지 못했다.
병사들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자 왕후는 화가 나 다시 죽이려 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는 다시 그녀의 집에 거동해 “네게 지금 태기가 있다 하는데 누구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니 그녀는 “신첩은 평생 형제와도 동석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성의 남자를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뱃속의 아이는 대왕의 혈육이 틀림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큰 상금을 내리고 돌아와 왕후에게 그녀를 죽이지 말라고 말했다.
가을 9월 아기가 태어나자 왕은 “이 아이는 하늘이 내게 내린 아들이다”라고 기뻐하며, 교시(郊豕) 사건으로 생긴 아들이므로 이름을 교체(郊彘)라 짓고 주통촌의 여인을 소후로 세웠다. 그 전에 소후의 어미가 잉태하자 무당의 점괘가 “반드시 왕후를 낳겠다”고 하자 어미가 무척 기뻐했고 예언대로 딸을 낳으니 이름을 후녀(后女)로 지었다고 한다.
교체는 10살 때 정윤(동궁)이 되고 24세의 나이에 다음 태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동천태왕이다. 이렇듯 을파소는 5년 후에 소후가 생기고 그녀에게서 대통을 이을 아들 동천태왕이 태어날 것을 미리 알았던 선인이었던 것이다.
 ▲ 어린이 동화에 그려진 산상왕과 주통촌 여인과 아기 동천왕.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는 산상왕이가 주통촌에서 돼지를 잡은 여자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집으로 찾아가 신분도 모르는 여자를 보자마자 합방했다고 기록했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이는 그렇게 태어난 동천태왕의 출신을 비하시키려고 살짝 각색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고구리사초·략>에는 산상제가 소후를 거둔 상황에 대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산상제는 주통천에 있는 소후가 관노부의 명문가인 연백의 딸로 이름이 후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당시 15살이라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차에, 주통촌에서 왠 여자가 돼지를 잡았다고 하자 이를 이상히 여겨 후녀를 찾아가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상세한 이야기는 아래 <고구리사초·략> 기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소후가 누구인지 미리 알고 있었던 산상제
산상대제 7년(203) 계미 3월, 임금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빌었다. 임금이 국상 을파소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다가 한숨지으며 “앞서 간 형이 내게 형수를 맡기며 아들을 낳으라고 하셨건만, 7년이 지나도록 그러지 못해 그 뜻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효의 하나요. 발기와 다투다가 나라의 서쪽 땅을 잃었으니 불효의 둘이요. 태후께서 정(情)을 마음 내키는 대로 통하시어 내외를 시끄럽게 하는데도 이를 말리지 못하니 불효의 셋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을파소는 “하늘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왕의 일들은 운 아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춘추 아직 젊으시니 소후가 있으셔야 하오며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웃으면서 “상국께서는 과연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구려. 지난 보름날 밤 꿈에 천제(天帝)를 뵈었더니 역시 소후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소. 허나 소후가 없으니 어찌 해야 좋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을파소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는 “신이 밤에 천문을 보니 빈 하늘에 용의 빛이 서렸기에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했더니 주통촌에서 뿜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촌장은 연백이라 하는데, 본래 관노의 명문으로 충성심과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을 아끼고 신을 섬기며 나라에 보은할 줄 압니다. 들어보니 정숙한 딸이 있으며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내리신 뜻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연백이란 자가 과연 괴왕에게 제사를 올리고 딸을 낳았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필시 왕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기에 이름을 후녀라 지었다고 하며 지금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8월 국상 을파소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을파소는 명재상 을두지의 후손이고, 부친은 서하(西河) 태수일 때 외척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다. 을파소 역시 강직하고 굳세어 뜻을 굽히지 않고는 산중에 숨어 살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국천제가 불러내 국상을 시키니 7정(政)을 행했다. 7정이란 임금을 우러러 보고(尊君), 백성을 바르게 하며(正民), 현자를 기용하고(用賢),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며(訓育), 재능을 좋게 하고(良才), 농사와 수렵에 힘쓰며(農獵), 변방을 지키는(邊塞) 것을 말한다.
이러했기에 나라 안의 대사건이었던 발기(發岐)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차분하고 좋은 계책으로 잃어버린 서쪽 땅을 복구했고, 나라의 큰 우환인 후사가 끊김을 소후를 통해 동천제를 낳게 했으니 그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이 시절 세상 사람들은 우소와 을파소 및 연백을 삼왕으로 여겼는데, 우소를 신선(神仙)의 왕, 을파소를 정교(政敎)의 왕, 연백을 은일덕행(隱逸德行)의 왕이라 했다.
12년(208) 무자 11월 교제를 지낼 돼지가 도망하자 담당관리가 쫓아가다 주통촌에 다다랐더니, 한 여자가 그 돼지를 가로막아 붙잡았는데 바로 후녀였다. 임금이 신기하게 여겨 주통촌으로 거동해 후녀를 거두었다. 상관이라는 자가 임금의 밀명을 받아 연백의 집을 경호했다. 후녀가 임금의 아들을 가졌고, 임금은 후녀와 동생을 함께 처로 삼았다.
 ▲ 을파소의 부친이 태수로 있었던 서하군은 섬서성 북부. <이미지=필자제공>
 
13년(209) 기축 5월, 우황후가 사람을 시켜 후녀를 죽이려고 하자 경호병들과 싸웠는데 상호간에 살상자가 있었다. 임금이 후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9월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고 소후가 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동천제와 소후는 항상 을파소를 은인으로 여겨 초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고구리가 통치했던 서하(西河)는 어디인가
을파소의 부친이 역임한 적이 있는 서하태수라는 관직은 서하군(西河郡)을 다스리는 태수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시 서하군 지역이 고구리의 강역이었다는 말인 것이다. 서하군은 글자 그대로 황하 서쪽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섬서성 북부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서하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서하군은 고대의 위치가 한 곳이 아니다. ①춘추 때 북부 하남성의 동쪽인 준현과 골현의 땅, ②진·한 때 섬서성 진섬협곡의 양안 중 서쪽에 설치, ③당태종 때 산서성 중남부 개체와 평요현 일대였다가 폐하고, 742년 서하군으로 고쳤다가 758년 분주로 복원됐다.
(원문) 西河郡古代所指不一。①春秋卫西境沿黄河,称西河,即今浚县、滑县等地。②魏取秦今陕西黄河沿岸地,置西河郡,则以晋陕间黄河为准,西岸为西河。③汉时西河郡是汉代名郡,西汉初由上郡析出,地在今黄河晋陕峡谷两岸。④贞观元年省介州,以介休、平遥二县来属,文水还并州。十七年以废吕州之灵石来属。④天宝元年改为西河郡,乾元元年复为汾州。
서하는 고구리 시조 추모대제(주몽) 12년(B.C 26) 친정해 빼앗은 이래 줄곧 고구리의 강역이었다. 광명대제(유리)를 거쳐 대무신제 “2년(29) 기축 정월, 한남(汗南)국이 가물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의지하려는 이들이 1000여 호가 됐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서하에서 살도록 했다”는 기록과 “14년(41) 신축년 엄표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이 수해로 초토화 돼 백성들을 서하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황제 때는 “4년(115) 을묘 2월, 서하·남구·하성·안평·장령·도성·둔유·평곽·하양·고현·남소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쪽과 남쪽을 대비했다. 12년(123) 계해 2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했다”와 “28년(139) 기묘 6월, 서하태수 상잠이 아우 번과 함께 맥의 기병을 이끌고 령동도위부의 진보를 빼앗아 돌아왔다. 9월 령동태수 공손현이 개마를 침략해 노략질하다가 패해 돌아갔다. 목도루는 서하를 지켜냈고, 상잠은 안평을 지켜냈다”와 이 외 여러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