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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요나라(거란)와 청나라(여진), 고구리에 황제국 추존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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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요나라(거란)와 청나라(여진), 고구리에 황제국 추존

스카이데일리, 331년 어질고 현명한 군주였던 미천대제의 32년 치세가 끝나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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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년 어질고 현명한 군주였던 미천대제의 32년 치세가 끝나고, 314년에 3살의 나이로 태자가 된 사유(斯由)가 20세에 다음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비운의 황제인 고국원제(故國原帝)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의 휘(諱:이름)는 사유(斯由), 또는 유(劉), 또는 쇠(釗)라고 하면서도 몇째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에 반해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국원제는 미천대제의 셋째 아들로 주유극(朱留克)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고, 키가 크고 몸도 우람했으며 풍채는 수려했고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해 백성을 아끼고 효와 우애로 정이 두텁고 화목했으며, 또한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고 용병하기를 좋아했다.
모친 주(周)씨를 태후로, 태자비 전(腆)씨를 황후로, 장자 완(完)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나라 안에 널리 사면령을 내렸다. 선황의 뜻을 이어받아 남정서벌(南征西伐)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항상 군진의 선두에 서서 몸을 앞장 세웠다가 끝내는 흐르는 화살을 맞고 붕어하시니, 나라사람들이 이를 애통히 여겨 국강상왕(國罡上王) 또는 작은 을불(小乙弗)이라 불렀다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붕어한 위대한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의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앞에 국강상이 들어간다. 간략하게 풀이하면 나라의 북두칠성과 같은 분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평안한 세상을 만드신 호태왕이라는 뜻일 것이다. 광개토경은 업적을 말하는 것이므로 평안호태왕 하던가 그냥 호태왕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주(周)태후의 부친인 선방의 조상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동천제(東川帝) 때 귀화해 공주와 혼인했고, 마산(馬山)에서 여러 대에 걸쳐 선인(仙人)직을 지내다가 미천대제를 옹립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해 태보(영의정)까지 오르고, 나라의 근심거리였던 낙랑을 정벌하고는 낙랑의 왕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선방은 딸 거지(居知)를 미천제에게 후궁(소후)으로 바치고, 거지는 주씨 성을 하사받고는 총애를 독차지해 311년에 태자 사유를 낳는다. 사유는 흰 소의 운세를 타고 났으며 용모는 으뜸가는 위용이 있고 목소리는 큰물처럼 밝았더니, 상이 “이 애가 진짜 용의 종자로다”라고 크게 기뻐하며 삼보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고 한다. 주씨는 곧 황후가 되고 314년에 아들 무(武)를 낳자, 3살인 사유가 태자에 봉해진다.
중국기록에 황제(소열제)로 기록된 고국원제
춘추필법에 의해 역사를 기록한 중국사서와 이를 참고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리의 임금들을 칭제건원(稱帝建元)하지 않은 그냥 ~~왕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중국의 수서(隨書)에 유일하게 “위궁(산상태왕)의 현손은 소열제(位宮玄孫之子曰昭烈帝)라고 말한다”라고 칭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문구가 최근 사실이며, 게다가 소열제(고국원제)만 황제가 아니라, 고구리의 임금들 대부분이 자체연호를 쓴 황제였다는 사실도 밝혀진 것이다.
① <태백일사>의 고구리 건원칭제 기록
고구리 임금들이 자체연호를 쓴 황제였다는 기록은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서 일부 찾을 수 있다. 물론 28대 모든 임금의 연호가 기록된 것이 아니라, 8명의 임금이 건원칭제했다는 사실을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역사를 스스로 비하하기를 좋아하는 강단사학계는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하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국내에서 출토된 유물로 인해 이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아래 도표는 ~~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고구리는 자체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었다고 기록한 <태백일사>를 비교해 놓은 것이다. 아래 8개의 연호 중 광개토태왕의 연호 ‘영락’은 집안에 있는 호태왕비문에 나와 있으며, 장수태왕의 연호 ‘건흥’은 1915년 중원고구리비 근처에 있는 사찰에서 발견된 ‘건흥5년명 금동석가삼존불’의 광배 후면에 명문으로 새겨져 있어 이 기록의 사실성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명과 <태백일사>에 기록된 연호와 황제명 비교표 [자료=필자제공]
 
② <고구리사초략>의 고구리 건원칭제 기록
<고구리사초략>에는 아래와 같이 8분 임금이 건원칭제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조 추모대제(동명성왕) 동명(東明), 2세 광명대제(유리명왕) 광명(光明), 3세 대무신제 대무(大武), 6세 신명제 신명(神明), 19세 광개토대제 영락(永樂), 20세 장수대제 장수(長壽), 21세 명치대제(문자명왕) 명치(明治), 22세 안장대제 안장(安藏), 23세 안원대제 대장(大藏)
  
 ▲ <태백일사>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유물 ‘건흥5년명 금동석가삼존불’ [사진=필자제공]
③ <태백일사>의 대진국(발해)의 건원칭제 기록
고구리 뿐만 아니라 그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발해)도 건원칭제를 했던 황제국이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건원칭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에도 같은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에서 발견된 정혜공주 묘비와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발견된 정효공주 묘비명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문구에서 4대 문황제(대흠무)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음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0909 참조)
<요천제>와 <만주대제>의 건원칭제 기록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고리황제품위(遼天祭 高麗皇帝品位)>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고리대제의예(滿洲大祭 高麗大祭儀禮)>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한 황제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현재 러시아 모처에 소장되어 있고, 내용은 논문에 인용된다고 한다. (자료제공: (사)고구리역사문화보전회의 정길선 학술위원)
 
 ▲  <태백일사>의 대진국(발해)의 건원칭제 기록은 <신당서>와 거의 일치 [자료=필자제공]
 
특히 강단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기록된 8명 고구리 황제들의 연호와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만일 출처의 판본 원본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면 지금까지 중국과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정리된 동아시아의 역사가 뿌리 채 흔들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천제>와 <만주대제>에는 <태백일사>와 <고구리사초략>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6대 고국원제의 연호 연수(延壽), 23대 안원제의 연호 연가(延嘉), 24대 양원제의 연호 영강(永康), 27대 영류제의 연호 함통(咸通) 등 4분 황제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 23대 안원제의 연호 연가(延嘉)가 광배 후면에 새겨진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이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어, 기록의 사실성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 <延嘉七年歲在己未 高麗國樂良東寺: ‘연가 7년’과 ‘고(구)려 낙랑‘라는 명문이 뚜렷하다. [사진=필자제공]

아울러 고구리 황제들에게 요나라 태종이 시호를 올렸고 청나라 강희제가 묘호를 추존한 이유는 요나라(거란)와 청나라(여진)도 고구리의 후예였음이 확실하기에 이러한 추존의식을 통해 요나라와 청나라가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라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가 자체연호를 사용한 천자지국(天子之國)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인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논리를 완전 타파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지방정권이 중국의 연호가 아닌 자체연호를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울러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는 강단사학계의 엉터리 역사이론도 완전히 붕괴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천제–高麗皇帝品位)>와 <만주대제–高麗大祭儀禮> 자료
~~황제 시호는 요 태종(야율덕광)이 추증했으며, ~종 묘호는 청나라 강희제가 추증한 것이다.
1대 고주몽(高朱蒙), B.C37-B.C19년, 묘호: 고조(高祖),
동명대제(東明大帝) - 추모성왕(鄒牟大帝) - 추모대동명광현고황제(鄒牟大東明光賢高皇帝)
- 동명대제(東明大帝) : 요나라 태종 (야율덕광)이 시호 추증
- 추모대동명광현고황제(鄒牟大東明光賢高皇帝) : 청나라 강희제 시호 추증)
연호 다물(多勿) - 다물왕(多勿王) : <태백일사>와 일치
※ <고구리사초략>의 ‘동명’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2대 고유리(高類利), B.C19-A.D18년, 묘호 : 태종(太宗)
유리명왕(榴璃明王) - 유류명효문태황제(儒留明孝文太皇帝)
 
3대 고무휼(高無恤), 18-44년, 묘호: 세종(世宗)
대무신왕(大武神王) - 대주류천효명세태황제(大朱留天孝明世太皇帝)
 
4대 고색주(高色朱), 44-48년, 묘호: 중종(中宗)
민중왕(閔中王) - 가천덕광무민중무황제(可天德光武閔中武皇帝)
 
5대 고우(高憂), 48-53년, 묘호: 덕종(德宗),
모본왕(慕本王) - 동광현무정모본덕황제(東光賢武定慕本德皇帝)
 
6대 고궁(高宮), 53~146년, 묘호: 세조 (世祖),
태조대왕(太祖大王) - 국조왕(國祖王) - 국조대태조성무황제(國祖大太祖聖武皇帝)
연호: 융무(隆武) - 융무대왕(隆武大王) : <태백일사>와 일치
 
7대 고수성(高遂成), 146~165년, 묘호: 현종(賢宗)
차대왕(次大王) - 공무현혜차대태황제(恭武玄慧次大太皇帝)
 
8대 고백고(高伯固), 165-179년, 묘호: 인종(仁宗)
신대왕(新大王) - 태강상무현신대황제(太康上武顯新大皇帝)
 
9대 고남무(高南武), 179-197년, 묘호: 문종(文宗)
고국천왕(故國川王) - 세무국현천호태황제(世武國賢天浩太皇帝)
 
10대 고연우(高延優), 197-227년, 묘호: 예조(睿祖)
산상왕(山上王) - 호상대위산상문황제(浩上大威山上文皇帝)
 
11대 고우위거(高憂位居), 227-248년, 묘호: 명종(明宗)
동천왕(東川王) - 동양왕(東襄王) - 현무천세동양태황제(現武天世東襄太皇帝)
 
12대 고연불(高然弗), 248-270년, 묘호: 영종(英宗)
중천왕(中川王) - 중양왕(中襄王) - 천호성세중양태황제(天鎬成世中襄太皇帝)
 
13대 고약로(高藥盧), 270-292년, 묘호: 정종(正宗)
서천왕(西川王) - 서양왕(西襄王) - 성문현중천서양태황제(成文玄中天西襄太皇帝)
 
14대 고상부(高相夫), 292-300년, 묘호: 영종(永宗)
봉상왕(烽上王) - 주혜의문상국수무황제(柱慧議文上國殊武皇帝)
 
15대 고을불(高乙弗), 300-331년, 묘호: 고종(高宗)
미천왕(美川王) - 호양왕(好壤王) - 영성태문호양황제(英成太文好壤皇帝)
 
16대 고사유(高斯由), 331-371년, 묘호: 신종(新宗),
고국원왕(故國原王), 국강상왕(國岡上王), 소열제(昭列帝) - 국강상대소열무황제(國岡上大昭列武皇帝)
연호: 연수(延壽) - 연수왕(延壽王)
※ <고구리사초략>의 ‘국강상왕’이라는 기록과, <수서>의 ‘소열제’라는 기록과 일치.
 
17대 고구부(高丘夫), 371-384년, 묘호: 소종 (昭宗)
소수림왕(小獸林王),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 소해주류대천황제(小解朱留大天皇帝)
 
18대 고이련(高伊連), 384-391년, 묘호: 목종(穆宗)
고국양왕(故國壤王) - 국양상지목현태황제 (國壤上持牧賢太皇帝)
 
19대 고담덕(高談德), 391-413년, 묘호: 성조(聖祖),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국강상광개토경평안영락호태황제 (國岡上廣開土境平安永樂好太皇帝)
연호: 영락(永樂) - 영락제(永樂帝) : <태백일사>와 <고구리사초략> 일치하고, 유물로 입증
 
20대 고거련(高巨連), 413-491년, 묘호: 숙종(肅宗),
장수홍제호태열황제(長壽弘濟好太烈皇帝):
연호: 건흥(建興) - 건흥대제(建興大帝) : <태백일사>와 일치하고, 유물 출토로 사실 입증
 
21대 고나운(高羅雲), 491-519년, 묘호: 성종(成宗),
문자명성치호태황제(文咨明成治好太皇帝)
연호: 명치(明治) - 명치대제(明治大帝) : <태백일사>와 <고구리사초략> 일치
 
22대 고흥안(高興安), 519-531년, 묘호: 진종(晉宗)
안장고보홍현황제(安臧高寶洪現皇帝)
 
23대 고보연(高寶延), 531-545년, 묘호: 선종(宣宗),
안원세영연가황제(安原世英延嘉皇帝)
연호: 연가(延嘉) - 연가제(延嘉帝) : 유물 출토로 사실 입증
 
24대 고평성(高平成), 545-559년, 묘호: 원종(原宗),
양원황제(陽元皇帝) - 양강상호원무황제(陽崗上好元武皇帝)
연호: 영강(永康) - 영강제(永康帝)
 
25대 고양성(高陽城), 559-590년, 묘호: 평종(平宗),
평원황제(平原皇帝) - 평강상대덕호황제(平崗上大德好皇帝)
연호: 대덕(大德) - 대덕제(大德帝) : <태백일사>와 일치
 
26대 고원(高元), 590-618년, 묘호: 효종(孝宗),
영양문효무원호태황제(瓔陽文孝武元好太皇帝)
연호: 홍무(弘武) - 홍무대제(弘武大帝) : <태백일사>와 일치
 
27대 고건무(高建武), 618-642년, 묘호: 헌종(憲宗),
영류황제(榮留皇帝) - 영류무장태혜천황제 (榮留武張太惠天皇帝)
연호: 함통(咸通) - 함통제(咸通帝)
 
28대 고장(高臧), 642-668년, 묘호: 희종(嬉宗),
보장황제(寶臧皇帝) - 개원현수대화보장황제 (開原賢秀大化寶臧皇帝)
연호: 개화(開化) - 개화제(開化帝) : <태백일사>와 일치
 
위 자료에 의하면 광개토태왕 이전에는 ~~제라는 칭호보다는, 일부 연호를 썼으되 호칭은 그냥 ~~왕이라고 한 것 같아 보인다. 이후에는 연호를 본격적으로 쓰면서 ~~제라고 했음이 확실하다. 요태종과 청강희제가 시호와 묘호를 추증한 것은 사실이나, 쓰지도 않은 연호까지 추증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즉, 고구리 황제들의 위 연호사용은 유물로 입증된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고구리사초략>에 “장수대제 16년(429) 기사 정월, 상이 졸본으로 거둥해 동명성황(東明聖皇)을 추모대제(芻牟大帝)로, 유리명황(琉璃明皇)을 광명대제(光明大帝)로, 주유신황(朱留神皇)을 대무신제(大武神帝)로, 국조선황(國祖仙皇)을 신명선제(神明仙帝)로, 태조상황(太祖上皇)을 태조황제(太祖皇帝)로 높였다”라는 기록도 있어 참고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