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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리의 세종’ 같은 임금, 강국·태평성대·어진 왕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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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리의 세종’ 같은 임금, 강국·태평성대·어진 왕

스카이데일리, 서천태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봉상왕이 동생인 돌고(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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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태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봉상왕이 동생인 돌고(咄固)를 죽이자 그의 아들 을불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달아나버린다. 봉상왕이 창조리가 주도한 정변으로 폐위되자,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을불이 추대되어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미천대제였다. 32년의 재위기간 중 반란을 일삼던 현토·서안평·낙랑 등을 평정해 나라의 근심거리를 없앴으며, 백성들의 애환을 잘 보살핀 훌륭한 군주였다.
 
32년(331) 신묘 2월, 미천대제는 자신이 위중해졌음을 알고는 태자 사유(斯由)를 불러 앞으로 오게 하더니 임금의 상징인 신검(神劍)을 건네주며 “봉상왕이 무도해 차자(次子)에서 나온 내가 보위에 올랐다. 네가 비록 나의 뒤를 잇게 되었으나, 무도하면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네 몸조차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친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지며, 군대와 백성들의 노여움을 키워서도 아니 될 것이다.
 
네 어미와 함께 정치를 하더라도 원래 여인네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침이 많아 실수하기 쉬우니, 네가 반드시 중심을 잡아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용씨와는 유불리를 다투지 말고 성을 튼튼히 방비해서 경계를 지키도록 해라. 토목공사 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라.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들을 잘 봉양해야 하며, 현자를 공경하고 재주 있는 자를 기용해 일을 맡기도록 해라.
 
설사 호색할지라도 절제해 과하지 않도록 해라. 너는 이 아비를 거울로 삼아도 될 것이다. 장례는 의당 검소하고 실하게 치를 것이며, 옥관과 금곽은 쓰지 말고 귀한 물건을 함께 묻으면 도둑들이 파헤치게 되니 그러지 말도록 해라. 네 어미 고향의 산수가 아주 좋으니 나를 미천(美川)의 석굴에 장사지내고, 네 어미가 나를 따라오게 되거든 함께 묻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숨을 거두니 춘추 54세였다.
   
 ▲ 백제에서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도. 神劍의 일종이다. [사진=필자제공]

 
러시아에 보관되어 있는 <요천제>의 ‘고구리황제품위(高麗皇帝品位)’와 <만주대제>의 ‘고구리대제의례(高麗大祭儀禮)’라는 자료에 의하면, 요나라 태종 야율덕광이 미천대제를 ‘영성태문호양황제 (英成太文好壤皇帝)’로 추존했으며, 청나라 강희제는 고종(高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추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황후가 동궁을 안아 관 앞에서 즉위시키고 3보(정승)의 조례를 받게 하자 백관들이 빈궁의 뜰에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동궁이 하도 슬피 울부짖다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되자 주황후가 이제 그만 그치라고 했으나 듣지를 않았다. 이에 태보 청견이 상주하기를 “천자의 상은 서민들과는 다르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만인의 부모가 되셨으니 사사로이 옥체를 훼손해 천하를 저버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몸을 야위게 함은 작은 예절이며 선비들의 행실인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당연히 술과 고기도 드시고 목소리 상태도 편안케 하시고, 호기를 함양하신 연후에 큰 정사에 임하시고 어려운 일을 처결해나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동궁이 슬픔을 억누르고 술도 마시면서 그의 주청을 쫓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주황후가 악공(樂工)을 불러 스스로 푸른 눈의 무희들과 함께 나체로 춤을 추며 즐겁게 하니 여러 비빈들도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자 상이 주변을 물러가게 하고는 방성대곡하고 구토하며 피눈물까지 흘렸다. 이에 주황후가 놀라며 상을 방으로 들여보냈는데, 밤새도록 기척이 없었다고 한다.
   
모용외와 석륵이 미천대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와 조문하고 부의도 후하게 냈다. 새 임금이 이 사신들을 친히 맞이해 빈례를 다했더니, 사신들이 돌아가 그들의 주인에게 “새로 선 임금이 지난번의 임금을 능가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석륵은 “을불은 사직을 오래도록 할 아들이 있어 나보다 낫소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나약해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놈들은 곁가지에서 나온 주제에 감히 큰 가지 출신인양 스스로를 높이면서, 몸 팔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 천한 것들이 감히 우리 동명성국(고구리)에다 견주려고 하고 있소이다. 죽여야 되지 않겠소? 우리나라는 대위를 한 번 정하면 다시는 두 말 한 적이 없는데, 갈족과 호족은 서로를 죽이며 멸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야말로 금수나 매한가지요”라고 말했다.
 ▲ 미천대제의 일대기를 그린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의 1~3권 [사진=필자제공]

 
<삼국사기>에는 “왕이 죽으니 미천 벌에 장사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고 하였다”라는 간단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고구리사초략>에서는 위 기록 외에 아래와 같은 찬자(撰者)의 평을 수록해 훌륭했던 임금인 미천대제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미천은 어린 나이에 피해 나가 매섭게 고생하다 8년 만에 돌아와 보위에 오르니, 밖에서 쌓은 배움을 안에서 어질게 베풀어 덕이 크게 행해져 관민들이 즐거웠고, 창고는 가득하고 양·돼지도 풍성해졌다. 군사를 조련해 강역을 넓혔더니 연(燕)과 조(趙)는 두려워서 굴복하고, 백제와 신라의 아들들이 찾아왔으며, 진(晉)과 월(越)은 찾아와 조공하고, 색두(索頭)가 정성을 다하니 태평하고 무사하여 앉아서 부귀를 누렸더라.
 
누런 금덩어리 온 누리에 가득하고 미녀들이 사방에 넘치니, 집집마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들마다 고량진미를 즐겼더라. 누에 치고 비단 짜기를 권장해 만금 비단이 쌓여있어 황후의 너른 옷이 천만금의 값이 되어도 직녀들이 비단을 다투어 바쳐오니 비단 옷엔 돈 한 푼 들어갈 일 없었다네. 소와 말도 온 산에 가득하며 절로 낳고 길러졌으니 아무리 먹고 써도 다함이 없었으며, 속·맥·두·량 살진 고기 먹기에 충분하고 어·별·장·압 또한 끊이지 않았다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사방에서 귀부하고, 벌판에다 마을 이뤄 즐거이 살아가며 이 낙원을 사랑하니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났네.
 
임금은 좋은 사람을 잘 써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내 잘 보살펴주고, 병든 이는 고쳐주고 우매한 이는 가르쳐 주었다. 짐 실은 배와 짐마차가 만 리를 서로 잇고 천리에서 모인 손님 한데 모여 술잔을 돌리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간에 바꾸었더니, 불편함도 없었으며 공물은 조금씩을 거두어도 큰 관청에 차고도 넘쳐났다.
 
임금은 비록 소백이 꾸짖을 일은 있었으나 민간의 부녀를 빼앗지 않았고 후비들도 많지 않아 후궁은 항상 비었었지만, 사랑함이 지나쳐서 섭생을 잃었었고 남색을 즐겼으니 우금과 도아의 폐단이 없지는 않았으나 옥(玉) 중에 티끌이며 성덕(聖德)의 허물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치 않거나 시속에 물들거나 행락지성과 호협지기가 있거나 하여, 왕왕 제왕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또한 애석한 일 아니겠는가?
 
미천이 성인의 도리를 깨닫게 하고 학문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가도 유학하는 이를 만나지 못해 천하게 살았더라면, 무리지어 말 타고 활쏘기나 일삼았을 것이고 오로지 먹는 것과 여색을 탐함을 삶의 모두로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나서 능히 미천과 같았었다면 그 역시 현군이란 일컬음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적과 과오를 과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훌륭한 임금이었다는 사관의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