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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려·백제 전쟁 속 흔적 ‘낙랑국’ 우리 역사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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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려·백제 전쟁 속 흔적 ‘낙랑국’ 우리 역사

스카이데일리, 낙랑은 처음에는 고구리의 속국으로 서로 혼인까지 하는 좋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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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처음에는 고구리의 속국으로 서로 혼인까지 하는 좋은 사이였다가, 대무신제 20년(47)에 낙랑이 배반하자 고구리가 낙랑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후 고구리를 적대시하는 잔당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동천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자 그쪽으로 붙어 오히려 고구리를 공격하는 세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낙랑이 중국의 식민지 한사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는 기록 이후 9년간의 기록이 생략된 다음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했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302년 이후 9년간 생략된 기록에는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고구리사초·략>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서부 낙랑을 식민지로 만든 백제 분서왕
<삼국사기 백제국본기> 분서왕조에는 “7년(304) 봄 2월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을 습격해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백제 분서왕 7년은 고구리 미천태왕 5년이다. 위 기록만 놓고 볼 때 여기서의 낙랑은 마치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 대한민국 사학계의 미천태왕 당시 고구려와 주변도 [이미지=필자제공]
 
<고구리사초·략>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미천대제 5년(304) 갑자 봄 2월, 백제의 분서(汾西)가 낙랑의 서도를 습격해 파하고는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寶菓)의 친정인 대방의 도읍이었기에 분서가 모친을 위해 탈취한 것이다. 낙랑 왕 자술은 장막사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태왕은 장막사에게 분서와 서로 모의해 낙랑을 분할시키라고 명했다.  
낙랑 왕 자술은 이에 화가 치밀어 고구리에게는 척화(斥和)했고, 분서가 서도를 습격해 탈취한 것에 대해 분을 참지 못해 원수를 갚고자 했다. 이해 10월, 낙랑 왕 자술의 신하에 황창랑이란 자가 있었는데, 계림사람으로 예쁘게 생기고 담력과 용기가 있었다. 황창랑이 미녀처럼 꾸미고 분서를 찾아가니, 분서가 그 미모에 빠져 수레 안으로 불러들이자 황창랑이 분서를 칼로 찔러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서 놀라운 사실은 서부 낙랑이 오히려 백제의 군(식민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사군이 아닌 백제의 군(식민지)이 된 낙랑을 한사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삼국사기>에 9년간의 기록이 삭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위 기록에는 낙랑이 고구리를 더욱 적대시한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고구리가 낙랑의 서부를 빼앗은 백제를 두둔했으니, 낙랑이 고구리에게 척화를 했던 것이다.
이어 “보과가 자신의 정부인 비류(比流)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고이(古尒)왕의 서자였는데 고이 시절에 민간으로 피해 숨어들어가 민심을 숙지했을 뿐만 아니라, 힘도 있고 활을 잘 쏘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분서왕이 죽자 아들들이 모두 어려 대를 잇지 못하고 구수(仇首)왕의 둘째아들 비류가 나라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영화 ‘왕의 남자’에서 아름다운 여자로 분한 배우 이준기 [사진=필자제공]
백제에서 6대 구수왕이 죽자 7대 고이왕이 53년간 재위했고, 8대 책계왕과 9대 분서왕이 도합 20년을 재위했다. 구수왕 사후 73년 후에 구수왕의 둘째아들 비류가 즉위해 41년간 재위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최소 73살에 보위에 올라 114살까지 살았다는 것인바 이는 생물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비류왕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처럼 고이왕의 둘째아들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미천태왕이 정벌한 낙랑의 정체는?
“5년(304) 미천태왕은 5부·9진·37소국에 명해 보·기병의 훈련을 감독케 하고는 그 공적을 살폈으며, 을유·면기·고희 등에게는 재주 있는 장정들을 가려 뽑아 좌·우위군(衛軍)에 배속시킨 다음 군병을 이끄는 용병술을 가르쳐 숙련시키게 했다”는 기록과, “8년(307) 정묘 가을 9월에는 수륙군 30만을 압록의 들에서 사열하고는, 그들에게 30만대군의 육성에 들어간 재물과 수고를 참작해 넉넉하게 보상해주었다”는 기록에서 미천태왕이 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키우는데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축적된 막강한 군사력으로 고구리는 낙랑을 공격한다. “9년(308) 무진 5월, 조문·뉴벽·부협·고식 등에게 명해 낙랑을 쳐서 그 군을 빼앗고, 남녀 300인을 사로잡았다. 낙랑 왕 자술이 아들 룡을 보내와 칭신하고 말과 토산물 12가지를 바치며 화친을 청해왔다. 선방이 동생 담을 자술의 딸과 혼인시켜서 두 군의 주인이 되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선제공격을 당한 낙랑이 결국 고구리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납작 엎드렸음을 알 수 있다.
 ▲ 요동, 요서와 낙랑의 실제 위치도와 참고 주요 지명들 [이미지=필자제공]
이때 훗날 전연(前燕)을 세우는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가 되는 모용외(廆)가 307년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한다. 이 말은 모용선비가 부족의 개념을 넘어 이제는 세력이 많이 커졌다는 말로, 고구리에게는 점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말인 것이다. “313년 모용외가 단과 도하(徒河) 땅을 취하고는 돌아갔다. 모용외는 투항한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이것이 소위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도하는 바로 요서군에 속하는 땅이다. <독사방여기요> 13권에 “도하성은 영주 동쪽 190리에 있는 한나라 현으로 요서군에 속한다 (《读史方舆记要·十三》 徒河城在营州东百九十里,汉县,属辽西郡)라는 기록이 있고,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도하현은 요서군에 속한 현으로, 호소(狐蘇)현에서 나온 당취수(唐就水)가 흘러 해(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곳임을 알 수 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호소),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도하),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모용외가 313년에 설치한 낙랑군은 낙랑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상태에서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마치 이북5도청처럼 관직만 임명한 상태라고 보면 된다. 모용외가 설치한 이 가짜 낙랑군이 아마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오인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낙랑이라는 나라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어지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미천대제 14년(313) 계유 봄 정월, 태왕이 태보 선방에게 ‘안평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낙랑을 깨야겠는데 계책을 장차 어찌 낼 것이오?’라고 했더니, 선방이 아뢰기를 ‘자술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으니 지략으로 취함이 좋고 정벌함은 마땅치 않을 것인즉, 신은 계략으로 기습해 취하시길 청합니다’라고 하니 태왕이 그러자고 했다. 이에 선방을 정남대장군으로 삼아 조문·뉴벽·장막사·창멱 등을 이끌고 형편을 살펴서 일을 도모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미천태왕은 언제 적대세력이 될지 모르는 낙랑을 아예 직할령으로 완전 복속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10월, 태보 선방이 낙랑 왕 자술과 살천원에서 만나 사냥하기로 했는데, 자술이 선방의 정예기병이 매우 많음을 보고는 도망치려 하는지라 선방이 따라가서 사로잡았다. 또한 조문과 뉴벽을 시켜 해변(황하변)의 모든 읍을 평정했다. 창멱은 교위부를 깨고 교위 속국 등의 일곱 명을 사로잡아 바쳤고, 장막사는 낙랑성을 습격해 깨고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바쳤다. 선방을 낙랑의 왕으로 삼고 작위를 태공으로 올리고는 낙랑의 무리들을 지키게 했다”라는 기록에서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낙랑이 평정되어 이후 고구리가 직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 민족의 대륙지배 사실을 지워버린 유령의 한사군도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상세한 설명도 없이 “미천왕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라는 짤막한 기록만이 있는 뿐이다. 게다가 이 낙랑을 낙랑군(樂浪郡)이라 표기해 마치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400년 만에 소멸된 것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