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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고구려 대적 ‘전연 모용외’…모친은 고주몽 적손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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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고구려 대적 ‘전연 모용외’…모친은 고주몽 적손

스카이데일리, 미천대제가 반란을 일삼던 낙랑·현토·대방을 정벌할 무렵,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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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대제가 반란을 일삼던 낙랑·현토·대방을 정벌할 무렵, 서진에서는 8명의 왕족이 내란을 일으키고 이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 흉노와 선비 등 외부세력을 중국 땅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서진이 약화되자 무력으로 개입한 이민족들은 그 땅에 아예 그들의 정권을 세우게 된다. 304년 흉노족 유연이 한(漢)을 세우고, 저족 이웅이 성한(成漢)을 세우고, 307년 선비족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면서 5호16국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호란 한족이 아닌 주변의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족을 말하는 것이며, 16국시대란 서진이 멸망할 무렵 이들이 한족이 세운 4개국과 더불어 좁은 중국 땅에서 16여개의 나라를 세워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약 135년간의 대혼란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족은 흉노의 일파이고, 선비족은 탁발, 모용, 독발, 걸복 등이 각자 중국에서 나라를 세웠기에 세분하면 사실 5호가 넘고, 나라도 16국이 넘는다고 한다.
 
316년 서진이 한의 유연(흉노)에게 멸망하자 왕족 사마예는 옛 오나라 땅이었던 건업(호북성 악주)으로 피신해 그곳 지방호족의 힘을 빌려 이듬해 동진을 세우게 되고, 서진의 신하였던 장궤는 독립해 전량(前涼)을 세운다. 이 무렵 탁발선비가 대(代)를 세워 중국은 6개국으로 쪼개졌다가, 이후 평균수명 약 30년밖에 안 되는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곤 했다.
 
참고로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흉노) 한(漢) --> 전조(前趙, 304~329), 하(夏, 407~431), 북량(北涼, 397~439)
 
( 갈 ) 후조(後趙, 319~351)
 
(선비) 전연(前燕, 307~370), 후연(後燕, 384~409), 서연(西燕, 384~394), 남연(南燕,398~410),
           대(代) --> 북위(北魏, 315~534), 서진(西秦, 385~431), 남량(南涼, 397~414)
 
( 저 ) 성 한(成 漢, 304~347), 전진(前秦, 351~394), 후량(後凉, 386~403)
 
( 강 ) 후진(後秦, 384~417)
 
(한족) 전량(前涼, 317~376), 염 위(冉 魏, 350~352), 서량(西涼, 400~421),
북연(北燕, 409~436)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5호16국 지도. 대륙을 실제로 지배했던 우리 3국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미지=필자제공]

 
모용외의 외가는 고주몽의 적손
 
이 중에서 고구리를 가장 괴롭혔던 나라가 바로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前燕)이었다. 애초 고구리의 남쪽 요택(遼澤)에 살던 선비족에 강력한 수장 모용외(慕容廆)가 나타나면서부터 그 세력이 커지기 시작해, 아들 모용황 때 이르러 나라를 세우게 된다. 모용외는 선비족 자몽 왕의 후예이고 어미 을씨가 고주몽의 적손인지라, 서몽대왕이라 자칭하고는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307년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한 모용외가 313년 4월에 단씨(선비)의 도하 땅을 취해서 돌아가니 장통이라는 자가 투항해왔다. 모용외가 그를 낙랑태수로 삼았는데, 이것이 소위 모용외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이라 한다. 현재 한국의 이북5도청과 같이, 통치하는 땅도 없는 상태에서 관직만 부여한 이름뿐인 가짜 낙랑군이었다.
 
315년 5월, 모용외가 6촌동생인 모용구를 보내 입조해 토산물과 인삼・감초・단서피 등 50종을 바치자, 미천대제가 “네 형이 천명을 알고 있다면, 곧 하서(河西) 땅을 바치고 서로 간의 경계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모용구는 “저희와 같이 작은 나라는 큰 진(동진)의 신하입니다. 어찌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이 웃으면서 “우리가 취하려는 것이 바로 그 큰 진이다. 돌아가거든 네 형에게 조속히 찾아와 항복하라고 전해라. 그리하지 않으면 왕애와 경창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모용구가 “최체(最彘)와 양화는 역시 하북의 땅으로, 저희 조부(木延)께서 일어서신 곳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슨 연고로 그곳을 가지려 하십니까?”라고 항변하니, 상은 “우리 세조이신 유리명황 11년에 부분노가 그 땅을 평정하여 속령이 된지 오래이다. 너의 조부 역시 내 신하가 아니더냐?”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모용구는 “신의 조부의 조부께서 자몽천에서 처음 나실 때부터 우문씨와는 원수가 되어 잠시 하서의 땅으로 옮겼다가, 다시금 파동・오림・대극의 땅으로 내려왔기에 최체 이남 모두는 저희들의 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은 “하남의 땅도 모두가 짐에게 속하지만, 최체의 작은 땅은 너희에게 내어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모용구는 돌아가서 모용외에게 얻은 것에 대해 무엇을 고해야 할지 몰랐다. 모용외는 화가 단단히 나서 화친하기를 그만두었다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있다.
 
위에서 말한 왕애는 그 해 2월 미천대제가 방부 등을 보내 현토성을 빼앗고는 참수한 그곳 수장을 말하는 것이고, 경창은 302년 총사령관이 된 선방이 수륙군을 진군시켜 남소성을 공격해 참수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남소태수를 말하는 것이다. 최체는 체현(彘縣)을 말하는 것으로 산서성 중남부 임분시 북쪽에 있는 곽현(霍縣)으로 하서(河西)와 거의 같은 지역으로 보이며, 대극(大棘)은 남부하남성 상구시 석성현이다.
 
외가가 고주몽의 적손인 모용외는 하서는 조부(목연)가 일어났던 곳이라는 이유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천대제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미천대제는 그곳은 오래전부터 고구리에 속한 영토이고 모용목연조차 고구리의 신하였다는 이유로 그곳은 고구리의 땅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기주장만 하는 장면이다. 이렇듯 모용선비는 고구리와 인연이 아주 많은 종족이었다.
 ▲ 모용외 관련 지명, 요택은 선비족의 원래 고향 [이미지=필자제공]

 
이간책으로 위기를 모면한 영리한 모용외
 
<자치통감> 기록에는 모용외가 서진에서 ‘영가의 난’을 피해 투항해온 한족들을 적극 받아들여 관리로 임용하고 중국풍의 예절제도를 채택해 세력을 크게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했으나 유민들이 오지 않자 모용외가 이들을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최비는 몰래 고구리・단씨・우문씨에게 함께 모용외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설득해 3국이 군사를 합쳐 모용외를 토벌하러 갔다.
 
모용외 휘하 여러 장수들이 3국과 맞붙어 싸우자고 건의하니, 모용외는 “저쪽은 최비의 꼬임에 빠졌으며, 한데 뭉친 이점을 노리고 있다. 저쪽의 군세는 합쳐졌으니 심히 날카로울 터이니 맞싸워서는 안 되고, 응당 단단히 지켜서 그 예봉을 꺾어야 한다. 저들은 형편없는 군대들이 합쳐졌으며 아직 한 사람의 지휘 하에 있지 않으니, 서로가 한 사람 휘하로 들어가기는 불가할 것이고 시일이 지나면 필시 사이가 나빠질 것이다. 그리 되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최비와 함께 자기들을 속여서 이길 것이라고 걱정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끼리도 시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마음이 둘로 갈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3국이 진격해오자 모용외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사람을 보내 우문씨의 군대에게만 소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했다. 이에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사전에 뭔가 모의한 것으로 의심해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지략으로 위기를 넘긴 모용외의 영리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중국 선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용외 상 [사진=필자제공]

 
그러나 우문선비의 대인 실독관은 비록 두 나라가 돌아갔다 하더라도, 당당하게 혼자서라도 모용외를 쳐서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덤볐다. 그러자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과 장사 배의에게 정예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실독관은 애당초 아무런 대비가 없었기에 크게 패하고는 간신히 몸만 빠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듣은 최비는 두려워하며 조카 최도를 극성에 거짓축하사절로 보냈다. 세 나라의 사신들도 역시 도착해 화친을 청하며 말하기를 “원래 우리들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최비가 우리에게 그리 하라고 시켰습니다”라고 말하니, 모용외의 곁에 서있던 병사들의 위엄에 두려움을 느낀 최도가 마침내 계획을 자수하고 말았다. 모용외는 최도를 돌려보내면서 최비에게 이르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하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최도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만을 데리고는 가족도 버린 채, 고구리로 도망쳤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고노자 같은 고구리 장수가 하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모용외는 장통을 보내 그 장수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천여 호를 사로잡았다. 최도 등 여러 명이 극성으로 귀순하기에 그들을 손님의 예로 대했다라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은 중국기록이라 그런지 모용외 쪽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고구리사초략>에는 위 내용과 많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 연재에 그 내용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