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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5호16국 시대 중국 대륙의 강국이었던 고구리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3584

 

스카이데일리, 5호16국 시대 중국 대륙의 강국이었던 고구리

스카이데일리,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나(我)와 나 아닌(非我) 자와의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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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나(我)와 나 아닌(非我) 자와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역설했다. 즉 자국의 역사는 철저히 나(我)의 관점에서 기록해야 한다는 주체적 역사기록의 원칙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사서라 하는 <삼국사기>는 주로 중국의 사서를 인용해 편찬되어 있어 우리가 아닌 중국의 관점에 입각한 역사적 기술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난주에 연재한 <자치통감>의 모용외와 최비에 대한 기록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3311 참조)
 
<자치통감>의 내용은 중국이 자기네 5호16국의 하나인 모용외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며, 3국 연합군의 모용외 정벌을 마치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주도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역시 중국의 <자치통감>을 인용했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은 고구리(我)의 관점에서 기록한 사서인지라 그 내용 또한 <자치통감>이나 <삼국사기>와는 아래와 같이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서는 모용외가 서진에서 투항해 온 한족들을 적극 받아들여 관리로 임용하고 중국풍의 예절제도를 채택해 세력을 크게 키워나가자, 서진의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했으나 돌아오지 않자 모용외가 이들을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해 319년 최비가 고구리·단씨·우문씨에게 함께 모용외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설득해 3국이 군사를 합쳐 모용외를 토벌하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 “303년 여름 4월 상이 모용외가 인재를 기용했던 예를 그대로 따라했더니, 재능이 있는 자라면 비록 한(漢)족이거나 월(越)인이라도 역시 올 수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모용외가 한족이라도 인재로 기용했던 때가 이미 16년 이전의 일이라, 모용외가 서진의 유민들을 억류했기 때문에 최비가 3국 연합을 제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비가 3국 연합을 제의한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 미천태왕의 일대기가 그려진 김진명 역사소설 고구려 1~3권 [사진=필자제공]
 
“미천대제 19년(318) 무인 여름 5월, 상이 현토태수 고경을 보내 하성(河城)을 쳐서 빼앗았다.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와 신하를 칭하면서, 우문선비와 함께 연합해 모용선비를 쳐서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이에 상이 담하를 우문씨와 단씨에게 보내 모용외 토벌을 공모하게 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3국 연합은 최비가 아닌 고구리가 실질적으로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보면 3국 연합이 아니라 고구리가 주도하고 우문씨와 단씨가 거든 연합으로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처음 고구리에게 우문씨와 연합해 모용외를 치자고 제안한 자가 최비인 것만은 사실이다.
 
“20년(319) 기묘 봄 정월, 담하가 요동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단씨는 내란 중이며, 우문씨는 가장 강성해져 있고, 모용씨는 새로이 번성해 그 위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우문씨와 모용씨의 동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변방을 조용히 수습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겁니다’라고 고하니 상이 흡족히 여겼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가 군사를 움직이기 전에 사람을 보내 미리 주변정세를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3월 미천대제가 순행 길에 신성(新城)과 안평(安平)에 이르러 부협과 고경 등에게 각자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국경 밖으로 나가게 했다. 10월, 상이 선옥에게 명해 휴도와 우경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모용외를 치니 모용외는 딸을 바칠 테니 화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상이 담하에게 자문을 구하니, ‘모용외는 단씨에게 장가를 들고는 단씨의 도하(徒河) 땅을 탈취했듯이, 겉은 어질지만 속은 험하니 화친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미천대제가 표리부동한 모용외의 화친제의를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 신성·안평은 산서남부 곡옥현 부근, 도하는 요서군, 극성은 창려(원곡) [이미지=필자제공]
 
“이리하여 선옥이 우문씨·단씨와 함께 진격하니, 모용외는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나오지 못하고 몰래 술과 음식을 보내와 화친을 청했다. 선옥은 이를 거절했으나 우문씨만이 이를 수락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모용외가 이간책을 쓰기 위해 우문씨에게만 술과 고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 고구리에게도 같이 보냈으나 선옥이 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즈음 날씨가 춥고 군사들이 지쳐있어 선옥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자, 사마현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깊숙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싸우지는 마십시오. 현재 우문씨는 갑자기 변심한 것 같고, 단씨는 본시 모용외와 한 족속입니다. 물러나서 변화를 살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서서히 도모하여 만전을 기함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신중한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선옥이 물러나자 단씨 또한 물러났던 것이다. 이를 <자치통감>에서는 모용외의 이간책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처럼 기록했던 것이다.
 
여하튼 모용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구리와 단씨의 철군 이후 “모용외는 아들 모용한과 함께 우문씨를 습격해 격파하고는 요동으로 진공하자, 최비가 단신으로 고구리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선옥이 나가 싸우다가 모용외에게 패해 죽자, 미천대제는 휴도에게 선옥의 군사를 대신 이끌게 했다. 선옥은 용감해 싸움은 잘하나 적을 얕잡아보는 기질이 있어 혼자서 말을 몰아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다 패해서 죽은 것이다. 선옥은 평소에 수하들에게 번번이 욕했기에 부하들이 선옥을 구하려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을 요동태수로 삼아 휴도를 치니 고구리는 연패해 평곽(平郭)을 잃었다. 이에 소우가 안평태수가 되어 2만 병사를 이끌고 가서 휴도의 군대를 구했다”라는 기록에서의 평곽은 <한서지리지>에는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이며, 190년 공손탁(도)이 자립해 요동후 겸 평주목이 되었을 때 요동군을 요동·요서·요중의 3개 군으로 나누었을 때 요중에 속했던 현으로 보아 요동군과 요서군의 중간지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2월 고구리 장수 고경이 하성에서 모용외가 보낸 장통과 싸우다 패해 죽었다. 이에 미천대제는 방부에게 현토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하성을 구하라고 지시했으나, 방부는 하성으로 가지 않고 요동으로 곧바로 달려갔다. 모용외는 아들 모용한을 시켜 모용인을 구하라고 하니 모용한이 잘해냈다. 이 소식을 듣은 미천대제는 지구전을 펴려고 방부에게 피아간의 경계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장통은 하성에 있던 천여 호를 포로로 이끌고 돌아갔고, 이후 고구리가 여러 차례 요동을 쳤으나 모용외가 모용한을 요동으로 옮겨 진을 치게 하고 모용인은 평곽에 진을 쳐서 막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미천대제 21년(320) 경진 정월에 낙랑 땅을 평정했던 낙랑왕 선방이 죽는다. 선방은 풍채가 멋졌으며 권모술수에 능했고, 타인과 아랫사람들을 잘 돌보아주었던 인물이다. 미천대제를 옹립하던 중에 찬탈을 획책하기도 했으나 주황후에 의해 저지되었고 끝내는 천명의 소재를 알았으며, 직무에 임해서는 남서쪽의 땅을 넓히려고 애썼으나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 64세에 죽었다고 한다.
 
“3월, 상이 신성으로 거둥해 군대를 살폈다. 9월, 모용인이 재차 휴도를 습격해오니, 아군이 패해 잃은 것이 심히 많았고, 휴도와 우경이 거기서 죽었다. 12월에 방부와 송거가 모용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모용외의 아들 모용인도 모용황 못지않은 무공을 갖춘 인물로 보인다. 이후 331년 미천대제가 붕어할 때까지 10년 넘게 고구리에 평화가 유지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5호16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려 서로 싸우느라 감히 고구리를 넘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 왜곡된 동진·전연·전진의 정립시대 지도. 실제 전연 땅의 주인공은 고구리였다. [이미지=필자제공]
 
“모용외가 옥새 3개를 동진의 도읍인 건강에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모용외가 강력한 고구려와 대적하기 위해서 동진과 손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중국백과사전>에서는 “태흥 3년(321) 동진정부가 그를 유주·평주의 도독·동이제군사·차기장군·평주목으로 임명했고, 요동군공 봉함을 받아들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지방호족의 힘을 빌려 세워진 힘없는 동진 정부가 자기네보다 강력한 모용외를 도독으로 임명하고 제후로 봉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구리사초략>에 “317년 동진의 사마예가 모용외를 창려(극성)공을 삼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모용외의 아들들은 용감하고 영특했는데 그중 뛰어난 아들 모용황을 321년 12월에 세자로 삼고, 궁의 동쪽에 학당을 만들어 자신의 모든 소생들을 공부하게 했고 자신도 짬짬이 친히 참석해 수업했다. 훗날 전연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모용황은 뜻이 크고 굳세었으며, 책략도 풍부하고 경서에 관한 학문 배우기를 좋아했기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325년 모용황은 모용인과 함께 우문씨의 국성으로 들어가 그곳 땅을 3백여 리나 지났다가 돌아오며 중병기와 가축을 모조리 노획하니 100만이나 되었으며, 투항해 온 백성도 수만이나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