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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낙랑군, 232년 존속 ‘낙랑국’ 우리 역사의 둔갑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1017

 

스카이데일리, 낙랑군, 232년 존속 ‘낙랑국’ 우리역사의 둔갑

스카이데일리, <삼국사기>에는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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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는 기록 이후 9년간의 기록이 생략된 다음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중·일 사학계는 위 기록의 현토군과 낙랑군, 요동군과 대방군 모두가 한나라 때 설치한 식민지 한사군이며, 그 식민지가 한반도에서 400년간 줄기차게 존속되다가 미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 여부를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은 과연 존재했을까?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식민지 한사군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한반도 대동강변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이다. 그 유물적 증거로 평양부근에서 낙랑봉니(封泥)와 점선현신사비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일제 때 유물의 위치이동을 통한 역사조작이었음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제는 특히 한사군 이론을 정립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이유는 단군은 신화이고 조선의 옛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한사군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매한 조선민족이 선진이민족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이 만들어낸 논리였던 것이다. 이런 망국의 역사이론이 아직까지 우리 국사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래 컬럼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 일제에 의해 조작된 낙랑봉니(좌)와 평남으로 옮겨진 낙랑군의 점선현신사비(우) [사진=필자제공]

* 전쟁에서 참패한 한나라가 어떻게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할 수 있는가?
* <사기 조선열전> 기록에도 없는 낙랑군과 현토군
 
* 한사군전쟁의 주무대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 일대
   
*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으로 둔갑된 우리역사 낙랑국
   
* 낙랑국은 232년간 존속했던 우리민족의 역사
   
위 내용들을 간단히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연방대제국이었던 조선(대부여)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북부여는 진한, 마한, 번한으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는데, 당시 번한은 기자의 후손인 기준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낙랑은 마한에 속한 소국이었다. 연나라 망명객 위만이 정변을 일으켜 번한의 왕이 되고 손자 우거에까지 이른다.
번한과 한나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한나라가 참패했으나, 전쟁에 두려움을 느낀 번한의 대신 5명이 작당해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전쟁이 끝나게 된다. 한 무제는 항복한 5명 대신들을 제후로 봉하고는 번한 땅을 나누어준다. 그러나 당시 낙랑은 마한에 속했으므로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한 무제가 봉한 지역이름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한서>에서 “조선을 멸하고 낙랑·현토·임둔·진번의 사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면서부터 허구의 한사군이 생긴 것이다. 즉, 마한에 속한 낙랑은 번한이 변한 한사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중국역사가의 붓장난에 의해 허구의 400년 식민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즉, 낙랑군과 낙랑국은 별개가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였고, 232년간 존속했던 우리 낙랑국의 역사를 식민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으로 둔갑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본시 낙랑의 땅은 한반도 대동강변 평양이 아닌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 일대 [이미지=필자제공]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낙랑의 연혁
과연 식민지 낙랑군이 한반도에서 400년간 줄기차게 존재했었는지 여부를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그 연혁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임오년(B.C39) 봄, 낙랑 및 졸본과의 경계를 정하고, 가을에 소서노를 비로 삼았다”와 “추모대제 4년(B.C34) 정해 정월, 탕동에 있는 갈(鞨)의 10부락을 정벌해 강 밖으로 몰아냈다. 낙랑의 주군 시길(柴吉)과 함께 하남(河南)에서 사냥했다”라는 기록과 “15년(B.C23) 무술 5월, 동쪽으로 순행해 낙랑에 이르러 배를 타고 시길에게 가서 그의 딸 작(鵲)을 받았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당시 시길이 다스리던 낙랑은 고구리에 속한 소국(小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말갈족 10부락이 있던 탕동(湯東)은 탕하(湯河)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탕하는 하남성 탕음현 서쪽에서 나와 동류해 구 원하인 만금거와 합쳐 내황현 서남까지 흘러 위하로 들어가는 강으로 본명은 탕수이다. 당 태종 때 미온적으로 탕수로 개명했다.(源出河南汤阴县西,东流合万金渠旧洹河,至内黄县西南入卫河,本名荡水,唐贞观时,以水微温改名汤水。)”라는 설명이 있다.
이 탕하는 우리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이 바로 유주에 속한 발해군(渤海郡)으로, 고구리 멸망 후 동모산에서 후고구리(後高句麗)를 세운 대중상과 그 아들 대조영이 이해고의 당나라 대군을 천문령에서 전멸시키고 나라를 세운 홀한성(忽汗城)이기 때문이다. 천문령은 지금의 운태산(云台山)으로 중원제일의 청룡협이라는 대협곡이 있는 곳이다.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020 참조)
 ▲ 탕하는 하남성 학벽시 북쪽을 흐르는 강으로 이 일대가 대조영의 무대였다. [이미지=필자제공]
(2) 대무신제 “20년(47) 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해 제께서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남옥저로 패주했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해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했었다”라는 기록에서 접경지역에 있던 속국 낙랑이 고구리를 배반했음을 알 수 있다.
“27년(54) 갑인 4월, 호동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해 낙랑 주군 최리(崔理)의 새 도읍에 이르러 그의 딸과 좋아지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리고 고구리의 대군을 받아들였다. 옥저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배로 강을 건너 들어가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그 땅은 죽령군(竹岺郡)으로 삼았다. 낙랑은 시길부터 4대 80여년에 나라의 문을 닫은 것이었다”라는 기록의 낙랑국 멸망에 대해서는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809 참조
“29년(56) 병진 7월, 낙랑의 남은 무리들이 동쪽의 옥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장군 어비신을 보내 동쪽의 옥저를 빼앗아 해서군(海西郡)으로 만들고, 낙랑의 남은 무리들은 환아(桓阿)에서 살게 했다”는 기록에서의 옥저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래 컬럼 참조하기 바란다. 해서군과 환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옥저 부근으로 추정된다.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809 참조
(3) 태조황제 “24년(135) 을해 정월, 주나의 왕자 을음이 항복해 와서 고추가로 삼았고 진공주를 처로 주었다. 주나의 남은 무리를 환아의 낙랑인 부락으로 옮겨 서로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했다”는 기록과 “26년(137) 정축 5월, 주나의 남은 무리가 낙랑인들과 함께 패수 하구를 공격했다. 화직이 낙랑과 주나의 남은 무리를 평정하고 돌아와 좌보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낙랑의 잔당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30년(141) 신사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도성태수 을어가 그를 쳐서 죽였다. 낙랑태수 룡준이 서안평에 쳐들어오니 안평태수 상잠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신안과 거향까지 추격해 장언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유주로 도망쳐 들어갔다”라는 기록에서 낙랑과 대방이 계속 고구리에게 반기를 들고는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4) 동양대제(동천태왕) “11년(237) 정사, 류흔·선우사·오림 등이 대방과 낙랑 등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공손연에게 들어붙으니,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에 제께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는 계획을 함께 상의했다”라는 기록에서 강력한 제3세력인 공손연이 등장하자 위협을 느낀 고구리가 위나라와 손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낙랑은 당시 중국(위나라)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20년(246) 병인, 관구검의 난리 중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왕준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와 관구검을 돕자, 백제의 고이왕이 그 허를 틈타 이 두 나라를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들을 잡아갔다”라는 기록에서 고구리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친중국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는 “유무가 듣고 노하므로 왕은 이들이 침략해올 것을 염려해 그 백성들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관구검과 관련된 지명은 산서성 남부. 그렇다면 낙랑과 대방은 [이미지=필자제공]
(5) 서천대제 “5년(274) 갑오 가을 8월, 서진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토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나라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에서 당시 낙랑은 서진의 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현재 한국의 이북5도청처럼 실제로는 땅을 통치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구와 관리들만 임명해놓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평주에 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진나라 때 유주에서 갈라지고 창려에 치소가 있었고, 전연 때는 양평에, 후연 초기에는 용성에 후기에는 평곽에, 전진 때는 화룡에, 후위 때는 비여에, 수·당나라 때는 북평군이라 말했으며, 원나라 때는 영평부로 바꾸고 노룡에 치소를 두었다.(晋分幽州置 治昌黎, 前燕置 治襄平, 后燕置 初治龙城 后治平郭, 前秦置 治和龙, 后魏置 治肥如, 隋置唐因之亦曰北平郡, 元改为兴平府 治卢龙)”라고 한다.
유주, 비여, 영평부, 노룡, 양평과 평곽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주는 유주의 요서군과 요동군 일대 즉 산서성 남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북평군은 요서군에서 분리된 행정구역으로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이고, 비여와 영평부와 노룡 등은 요서군에 속한 현이고, 양평과 평곽은 요서군의 동북쪽인 요동군에 속한 현이다.
위와 같은 연혁으로 볼 때 낙랑은 처음에는 고구리의 속국으로 서로 혼인까지 하는 좋은 사이였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무신제 20년(47)에 낙랑이 고구리를 배반했고 급기야는 고구리가 낙랑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그 이후 고구리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잔당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위나라의 관구검이 쳐들어오자 그쪽으로 붙어 오히려 고구리를 공격하는 제3세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낙랑이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