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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대방고지(백제 시국처), 중국 산서남부 문희현 동쪽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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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대방고지(백제 시국처), 중국 산서남부 문희현 동쪽

스카이데일리, 백제·고구리를 멸망시킨 후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당나라를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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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리를 멸망시킨 후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672년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와 명운을 걸고 최후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당나라 군대는 말갈과 함께 석문의 들(石門之野)에 진영을 치고, (문무)왕은 장군 의복과 춘장 등을 보내어 대방의 들(帶方之野)에 진영을 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즉 이 말은 대방은 석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석문산(石门山)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28개 지명이 나타나듯이 워낙 많다보니, 어느 석문이 당나라가 신라와 싸우기 위해 진영을 펼친 석문인지 알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하북성 진황도시 석문설이나 석가장시 석문설은 아예 이 족보에도 없는 지명들이다. 석문이 한반도의 황해도 대방 근처에 있었다는 식민사학계의 이론 또한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 在今河北省邢台县西南九十里,《十六国春秋》石勒遣石季龙进据石门,参看石门寨条。(하북성 형태현)
(2) 《后汉书公孙瓒传》乌桓入寇,瓒追击,战于石门,大败之。《注》石门山,在营州柳城县西南。《水经注》灅水又东南迳石门峡,亦引瓒事,《明统志》谓蓟州东北六十里石门驿,即《水经注》之石门,按灅水所迳石门,在未隶遵化县西,与蓟州石门驿并非一地,《明统志》误。郦注引瓒事于灅水篇,亦非,其时瓒为辽东属国长史,辽东属国治昌辽县,即今河北省潜源县,石门山,西北距昌辽不过百里,史既明言属国石门,自以柳城西南为是。(하북성 잠원현)
(해석) <후한서 공손찬전> 오환이 쳐들어와 노략질하여 공손찬이 추격해 석문에서 싸웠으나 대패했다. 그 주석에 이르기를 석문산은 영주 유성현 서남에 있다. <수경주> 류수는 동남쪽으로 석문협을 지난다. <명일통지> 계주 동북 60리 석문역을 말하는데, 즉 류수가 석문을 지나므로 곧 수경주의 석문이다. (하북성 준화현과 잠원현이라는 설명은 지명왜곡이다)  
 ▲ 산서박물관의 ‘한말 소수민족 분포도’에 산서성 중부에 그려진 오환과 흉노 [사진=필자제공]

(3) 在今辽宁省辽县南四十里,旧有石门砦,明万历中李如松救朝鲜,道出于此。(요녕성 요현)
(4) 即吉林延吉县西之土门子。(길림성 연길현)
(5) 在山东曲阜县东北五十里,上有石门寺,唐李白有鲁郡东古门重别杜甫诗。(산동성 곡후현)
(6) 在山东蓬莱县西十里,山口翁石,为驿路所经。(산동성 봉래현)
(7) 在山东即墨县东南,状如门,天欲雨,则云自门出。(산동성 즉묵현)
(8) 在山西解县东南,一名径岭,左右壁立,间不容轨,谓之石门道,通河南陕县,亦曰白径道,战国时,秦败三晋之师于石门,周天子赐以黼黻之服。(산서성 해현)
(번역) 석문은 산서성 해현 동남에 있다. 일명 경령이다. 좌우에 벽이 서있어 그 사이로 수레가 지나갈 수 없다. 소위 석문도라 하며 하남성 합현과 통한다. 역시 백경도라 부른다. 전국 시기 진이 삼진의 사에게 석문에서 패했다. 주나라 천자가 보불로 수놓은 의복을 하사했다.
(9) 在安徽黟县东南三十里,凿石为门,下瞰溪潭,壁立千仞,沿岩壑路仅可通步,断处以木桥济之,名曰栈阁。(안휘성 이현)
(10) 在安徽含山县南二十里,石壁峭立如门,有谷道十里,商旅往来其中。(안휘성 함산현)
(11) 在江西靖安县北四十里泐潭之右。上有宝莲峰,即马祖道一卓锡之地,峰侧有宴坐岩。(강서성 전안현)
(12) 在浙江安吉县东北四十里,上有两石对峙如门。《梁吴均与顾章书》梅溪之西,有石门山,森壁争霞,孤峰限日,遂葺宇其上。(절강성 안길현)
(13) 在浙江青田县西七十里,两峰壁立,对峙如门,石洞幽深,飞瀑喷泻,上有轩辕丘,道书以为第三十洞天。(절강성 청전현)
(14) 在浙江永嘉县北十五里,上多名胜,谢灵运尝游此,有诗。(절강성 영가현)
(15) 在浙江嵊县西北二十五里,有石洞、龙湫、沸泉诸胜,又县西北九十里亦有山名石门,两石峭立如门,谢灵运有登石门最高顶及夜宿石门诗。(절강성 승현)
(16) 在浙江天台县天台山慧明寺之东北,两山壁立如门,过此即见石荀山。(절강성 천태현)
(17) 在湖北鄂城县东五里,《方舆胜览》两石对峙如门,唐武昌令马珦与元次山同游,石刻存焉,按蒲圻县西二十八里,咸宁县东四十里,崇阳到西五十里,俱有石门山,。(호북성 악성현)
(18) 在湖南石门县西十五里官司道旁,两崖壁立如门,县以此名。(호남성 석문현)
(19) 在湖南宝庆县北四十里,两山夹峙如门,资水经此。(호남성 보경현)
(20) 在湖南桂阳县西南六十里,接嘉禾县界,《舆地纪胜》山有岩穴,如门,岿水自蓝山穿石门西注,舟筏皆经其下,俗呼为仙人桥。(호남성 계양현)
(21) 在陕西栒邑县东,接淳化县北境。《汉王褒云阳宫记》“东北有石门山,冈峦纠纷,干霄秀出,有石岩容数百人。”明于此置关。(섬서성 순읍현)
(22) 在甘肃导河县西南,山高峻绝,对崖若门,《元和志》谓即皇兰山门。(감숙성 도하현)
(23) 在甘肃临潭县南十里,两山相对如门,山南即古垒州之地,为番界,俗名石门金锁,限隔羌夷。(감숙성 임담현)
(24) 在四川庆符县南五里,即古石门道也,《史记西南夷传》汉建元六年,使唐蒙治道自僰道指牂牁江,《水经注》唐蒙凿石开阁以通南中,迄于建宁二千余里,山道广丈余,深三四尺,堑凿之迹犹存,《唐书韦皇传》贞元九年,皇遗幕府崔佐时由石门趋云南,而南诏复通,石门者,隋史万岁南征道也,天宝中鲜于仲通下丘南溪,道遂开,至是皇治复之,号曰南道。(사천성 경부현)
(25) 在四川平武县东南,《左思蜀都赋》缘以剑阁,阴以石门。《元和志》石门山,在江油县东一百三里,有石门戍,与氏羌分界,《寰宇记》其山有石壁相对,望之如门。(사천성 평무현)
(26) 在广东省治西北,为南海县地,《史记南越传》元鼎六年,楼船将军将精卒先陷寻陋,破石门,《索陷引广州记》在番禺县西北二十里,因吕嘉拒汉,积石于江,名曰石门。《舆地纪胜》两山对峙,横截巨浸,据南北往来之冲,屹若门阙。(광동성 남해현)
(27) 在云南建水县东北百里箐口,凿石为门,以通车马,下临曲江,险隘可守。(운남성 건수현)
(28) 在云南陆良县西,石笋森密,参差不齐,周匝十余里,行者穿其中,故曰石门 (운남성 육양현)
위 28개의 석문 중 (2)과 (8)이 위에서 언급한 신라와 싸울 당나라 군대가 진영을 펼친 석문(石門)일 가능성이 높다. (2)의 석문산은 유성현 서남에 있다고 했으므로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요서군에 있는 마수산과 가까운 석문을 말하는 것이고, (8)은 산서성과 하남성 사이에 있는 석문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8)이 그 석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 (8)의 석문은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기에, 낙랑(산서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지역)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 대방과 멀지 않아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석문이기 때문이다. 현재 옛 지명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산서성 남부 문희현(聞喜縣)에 있는 석문향(石門鄕)을 말하는 것이다.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와 비류가 나라를 세웠다는 미추홀(운성염지 부근)과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유성현 서남에 마수산이 있다)。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또한 중국의 여러 사서에 “백제가 요서·진평을 경략해 차지했다”라는 기록과 석문을 통해본 대방의 위치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렇듯 확실하게 밝혀진 대방의 위치를 중국과 일제의 주장대로 황해도로 비정한 식민사학계와 제멋대로 현대지도만 보고 추측에 의해 역사지명을 아무렇게나 비정하는 엉터리 재야사학은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동부에 있는 문희현의 석문 [지도 이미지=필자제공]
 
대방은 한사군의 땅인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과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했다”라는 짧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중·일 사학계는 위 미천태왕 3년 기록에 언급되는 현토군, 12년의 요동, 14년의 낙랑군, 15년의 대방군 모두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식민지 한사군이며, 그 식민지가 한반도에서 400년간 줄기차게 존속되다가 미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대방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인용) 대방군(帶方郡)은 옛 고조선 땅에 설치되었던 중국 군현의 하나로, 한강 이북에서 자비령 이남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일원을 영역으로 했다. 이 지역은 본래 고조선의 속국이던 진번국의 땅으로 고조선 멸망 후 한나라에 의해 4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중국 군현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진번군은 곧 폐지되고, 낙랑군이 이 지역을 관할케 되었으며 곧이어 낙랑의 남부도위로 개편되었다. 30년 무렵 남부도위도 폐지되고 토착세력인 한(韓)·예(濊)의 성장으로 2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실상 낙랑군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3세기 초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에 새로 대방군을 설치함으로써 이 지역은 다시 중국 군현의 영역이 되었다. 대방군은 치소인 대방현 이외에 낙랑남부도위 관할이던 진번 7현을 관할했으며, 265년 서진의 성립과 함께 그 아래에 들어갔다. 서진 멸망 후 고구려에 의해 중국 본토와의 육상교통이 끊기자 자립 능력을 잃고 점차 약화되어 낙랑군과 함께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인용 끝)   
 ▲ 대방군이 황해도에 그려져 있는 중국이 그린 공손씨의 요동도 [이미지=필자제공]
위 백과사전의 설명 역시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황해도의 대방군 지역은 거의 400년간 중국 군현 즉 식민지였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현재 한·중·일 사학계의 이론과 오십보백보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과연 이 설명이 맞는지 연혁에 대해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대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방은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 하나이다. 낙랑군의 인구가 총 40만6748 명이므로, 부속현인 대방현의 인구는 채 2만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조차 우리역사의 낙랑국을 변조시킨 실체가 없는 허구의 한사군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대방군 역시 그 실체가 없는 허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1017 참조)
   

 ▲ 유령 같은 한사군이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위해 한반도로 옮겨진 모습 [이미지=필자제공]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대수는 서쪽으로 대방에서 해로 들어간다)。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