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제 신라

온조가 천도한 한성, 중국 황하 북부 하남성

by 고구리역사 2024. 5. 28.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2458

 

스카이데일리, 온조가 천도한 한성, 중국 황하 북부 하남성

스카이데일리, <삼국사기>에는 B.C 18년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

www.skyedaily.com

 

<삼국사기>에는 B.C 18년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으며, “온조왕 13년(B.C6) 7월 한산(漢山) 아래에 울짱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할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정하되 동으로 주양(走壤), 서로 대해(大海), 남으로 웅천(熊川), 북으로 패하(浿河)를 한계로 했다”라고 천도(遷都:도읍을 옮김)한 기록이 있다
 
천과 주양은 현재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며, 북쪽 패하는 패수(浿水)를 말하고, 서쪽 대해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지역을 100% 확실치는 않으나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濟源)시와 그 남쪽에 있는 맹주(孟州)시 사이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기록도 그런데다가 제원시의 글자가 백제의 제(濟)자와 근원 원(源)자라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고구리사초략>에는 온조의 백제 건국에 대해 “광명대제 3년(B.C17) 갑진 정월, 순노와 절노는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서, 관노와 계루는 온조가 우양(牛壤)에서 다스리게 했다. 7월 한남왕(汗南王) 온조가 입조해 위나성(尉那城)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해 윤허했다”라고 되어 있어 비류와 온조는 애초에는 고구리 광명대제(유리명왕)의 제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의 천도년도에 대해서는 “광명대제 14년(B.C6) 을묘 7월, 온조가 한산(漢山)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 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26년(7) 정묘 4월, 온조가 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온조에게 병사와 식량을 보내주어 한(韓)을 정벌하는 것을 도왔는데, 3년을 계속했다. 27년(8) 무진, 온조가 한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약간 다르기는 하다.
 ▲ <백제 시조 온조의 천도(위례성->한산) 추정도 [이미지=필자제공]
 
위 온조의 한(韓) 정벌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 26년(8) 10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위장하고는 몰래 마한을 습격해 그 나라는 합병시켰으나 두 성이 항복하지 않다가 이듬해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겨 마한이 드디어 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내용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백제(百濟)라는 국호에 대해서는 <고구리사초략>에 “대무신제 2년(29) 기축 정월, 한남(汗南)국이 가물고 메뚜기 떼가 일어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의지하려는 백성이 천여 호가 되었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서하(西河)에서 살게 했다. 12월, 온조가 나라이름을 한남에서 백제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어 온조가 맨 처음 사용한 국호는 백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제의 시국처인 요서·진평의 땅 즉 대방고지는 언제부터 고구리의 땅으로 되었을까?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보니 대부분 백제의 시국처 대방고지를 계속 백제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요서·진평을 차지하고 대방고지를 수복했다고 하니 어리둥절했던 것이 사실이다.
 ▲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의 진출로 [이미지=필자제공]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고구리사초략>의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대무신제 15년(42) 임인 9월, 백제의 다루가 한남(汗南) 옛 땅을 고구리에 바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즉 이때부터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고구리의 직접통치강역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를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 이르러 수복한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과연 어디일까? 대방은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 하나이다. 따라서 낙랑군 지역에서 찾아야 하는데 낙랑군 지역은 패수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졌으므로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로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고구리사초·략>에 “미천대제 5년(304) 갑자 봄 2월, 백제의 분서(汾西)가 낙랑의 서도를 습격해 파하고는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寶菓)의 친정인 대방(帶方)의 도읍이었기에 분서가 모친을 위해 탈취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낙랑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온조왕 13년(6) 여름 5월 왕이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우리 강토를 침략해 편할 날이 없다”면서 도읍을 옮기자고 신하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어 최초 백제의 시국처는 낙랑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시국처는 산서성 남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확실한 단서는 없을까? 아래 지난 컬럼에서 <통고>·<양사>·<남사>·<송서> 등 중국사서의 기록에서 백제가 경략해 차지했다는 요서(遼西)·진평(晉平)과 온조가 쌓은 마수성(馬首城)의 위치에서 시국처의 대략적인 위치가 산서성 남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때는 백제와 고구리가 망한 후인 문무왕 12년(672)으로 신라는 자기네까지 집어삼키려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사활을 걸고 최후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당군은 말갈과 함께 석문의 들(石門之野)에다 진영을 치고, (문무)왕은 장군 의복과 춘장 등을 보내어 대방의 들(帶方之野)에다 진영을 펼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방은 석문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 백제의 시국처인 요서·진평은 산서성 남부 [이미지=필자제공]
 
현재 한·중·일 사학계는 이 석문(石門)을 황해도로 보고 있으며, 한국의 재야사학에서는 하북성의 동단 진황도(秦皇島) 또는 현재 하북성 남부에 있는 성도(省都) 석가장(石家庄)으로 보고 있다. 진황도로 보는 이유는 난하를 고대 요하로 보기 때문이며, 석가장으로 보는 이유는 현대지도에 석가장 부근에 석문구(石門口)와 남석문(南石門)이라는 작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지명비정이 과연 옳을까?
 
진황도는 논할 가치조차 없고, 만일 석문을 하북성 남부에 있는 석가장으로 본다면 대방과 요서·진평 모두 하북성 남부로 가야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뒤죽박죽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라와 당나라가 전투를 벌인 석문은 어디란 말인가? 석문은 중국대륙에 워낙 여러 곳이 있기 때문에 어느 지명이 맞는 것인지 찾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