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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의 직할령이 된 낙랑
미천대제 14년(313) 계유 10월, 낙랑의 왕 자술이 고구리의 태보 선방에게 살천원이라는 사냥터에서 사로잡힘으로써 그동안 제3세력으로 존재했던 낙랑은 고구리에 완전한 직할령으로 복속되고 만다. 그동안 낙랑은 통치자의 정치성향에 따라 고구리의 속국으로 행세하다가도 때로는 반란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돕기도 했던 세력이었다.
이때부터 낙랑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고구리 중앙정부에서 임명·파견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그 첫째 통치자가 바로 낙랑 왕 자술을 생포한 태보 선방(仙方)이었다. 선방은 미천태왕을 옹립한 공신 12명 중 한사람으로, 딸을 태왕의 소후(주후)로 바치는 인물이다. 우보와 좌보를 거쳐 최고 관직인 태보가 되자 낙향했다가 낙랑을 정벌하고는 낙랑의 왕으로 임명된다.
태보 선방이 낙향한 이유는 딸 주후가 미천태왕에게 “제 부친은 신하될 의지가 없으니 큰 권한을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고하자, 태왕은 “당신의 부친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후는 태왕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는 부친인 선방에게 고향인 마산(馬山)으로 돌아가라 명했고, 선방이 배치한 5부의 내사자 10명을 모두 파직했다. 선방은 “내가 어린 딸로 인해 곤궁해지니, 이게 천명인가 보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21년(320) 경진 정월, 낙랑 왕 선방이 죽으니 태왕이 곡하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작년엔 선옥이 전사하더니, 이번 봄에는 친족부로 세 명이 나를 버렸다. 어찌하여 짐에게서 팔과 다리와 같은 신하를 빼앗음이 이리도 심한고”라 하고는, 선방의 아들 곽에게 돌아오라 명했고 마산에 묻어주었다. 상과 주황후가 친히 왕림해 사당을 세웠다.
26년(325) 을유 여름 4월, 미천태왕은 역시 12공신 중 한명인 방부(方夫)를 낙랑의 왕으로, 재생을 태보로, 오맥남을 좌보로, 명림섭을 우보로, 우린을 남소태수로 삼는다. 이후 기록에 의하면 고구리 중앙정부는 계속 낙랑의 왕을 임명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한다. 그 결정적인 유물적 증거가 1976년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이다.
벽화에는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던 무덤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올리는 13태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낙랑태수이다. 이 무덤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고구리가 13개 군이 속한 유주를 통치했다는 사실이다. 유주란 바로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유주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974 참조)
▲ 평남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13태수의 모습 [사진=필자제공]
백제·신라와도 관련 있는 낙랑
낙랑은 고구리 뿐만 아니라 백제·신라와도 관련이 많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에 “시조 박혁거세 30년(B.C 28) 낙랑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했다가 도둑질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돌아갔다”와 “남해차차웅 원년(4)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가 있으며, “유리이사금 14년(37) 고구리 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없애니 그 나라사람 오천 명이 와서 의탁하므로 육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또한 모화사대주의자에 의해 각색된 <삼국사기>에 의하면, 중국에서 신라의 왕을 봉할 때 ‘낙랑군공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이라고 했으며, 백제의 왕을 봉할 때는 ‘대방군공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을 많이 썼듯이, 백제와 신라는 대방·낙랑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구리 왕을 봉할 때는 ‘요동군공고구려왕(遼東郡公高句麗王)’이라고 했다.
<백제본기>에는 “시조 온조왕 8년(B.C 10) 가을 7월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11년(B.C 7)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울짱을 습격해 쳐부수게 하고 100명을 죽였다. 17년(B.C1) 봄 낙랑이 내침해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18년(1) 겨울 11월 왕은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해 구곡에 당도했으나 큰 눈을 만나 바로 돌아왔다” 등의 여러 기록이 있어 백제와 낙랑이 서로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幽州)에 속한 낙랑군의 위치는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그 이유는 낙랑군에 속한 패수(浿水)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의 시국처는 대방고지(帶方故地)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방은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국처(始國處)가 어디 부근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패수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3624 참조)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 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 한사군 전쟁의 주무대인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
<고구리사초·략>에 “미천대제 5년(304) 갑자 봄 2월, 백제의 분서(汾西)가 낙랑의 서도를 습격해 파하고는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寶菓)의 친정인 대방(帶方)의 도읍이었기에 분서가 모친을 위해 탈취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낙랑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온조왕 13년(6) 여름 5월 왕이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우리 강토를 침략해 편할 날이 없다”면서 도읍을 옮기자고 신하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어 최초 백제는 낙랑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국처는 산서성 남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확실한 단서는 없을까?
백제의 시국처는 어디인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정하자 이복동생인 비류와 온조는 고구리를 떠나 남하해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할 만한 땅을 찾는다. 따라온 신하들이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지했으며,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대해가 막혔으니 천험의 지형인지라 여기에 도읍함이 좋겠습니다.(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玉澤 西阻大海)”라고 했다.
그러나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해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尉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다시 돌아와 위례성의 안락함을 보고 뉘우치며 죽었고 그 백성들이 다 온조에게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한 백제의 건국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 낙랑의 서쪽에 있는 백제의 시국처와 당시 세력판도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 온조왕 8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번에 우리 땅에 가까이 와서 성과 울짱을 세우니 혹시 침략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으름장을 놓자, 온조왕은 “그대가 의심하여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말해 낙랑과의 평화가 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마수성은 과연 어디일까? 이 마수성을 찾으면 백제의 시국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백제 온조왕이 쌓은 마수성의 위치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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