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1941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조(백제)의 시국처인 하남 위례성은 동으로 높은 산(高岳)을 의거했으며, 서로는 대해(大海)가 막혀있고, 남으로 기름진 들(沃澤)을 바라보고,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는 곳이다. 참고로 당시 한수는 기록으로는 찾을 수 없으나 아마 나중에 압록수라 불렸던 현 분하(汾河)이거나 그 남쪽에 있는 속수하(涑水河)로 추정되어 진다.
형 비류는 물이 짠 미추홀(彌鄒忽)로 갔다가 돌아와 후회하고는 죽는다. 필자는 이 미추홀을 현 사학계의 이론처럼 인천이 아니라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 일대로 비정한다. 또한 운성염지는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기록된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조공을 하지 않는 비려(碑麗)를 토벌하면서 이른 염수(鹽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서는 이를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유리가 와서 고구리의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남편 고주몽의 곁을 떠나 두 아들을 데리고 진·번(辰番)의 사이의 땅으로 와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 땅의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北至帶水) 서쪽은 대해(西濱大海)에 임했다고 한다.
고주몽은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라고 봉한다. 소서노의 뒤를 이어 태자 비류가 즉위하자 동생 온조가 떠나 일행이 미추홀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지라 한참 만에 한산의 부아악에 올라 사방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도읍을 위지성(慰支城)에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형이 (동)고악·(서)대해·(남)옥택·(북)한수라는 것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같다.
▲ 비류의 미추홀인 산서성 운성염지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는 모습 [사진=필자제공}
그런데 <후주서>에는 위와는 약간 다르게 “백제는 마한의 속국으로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남으로는 모두 대해에 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이러한 백제의 시국처를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로 비정하고 싶다. 동쪽 고악은 산서성 동남부의 산악지대이며, 서쪽 대해는 큰 바다가 아닌 황하로 보아야 할 것이며, 남쪽에는 황하 또는 큰 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큰 강(분하 또는 속수하)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제의 시국처는 낙랑의 서쪽에 있는 대수가 흐르는 대방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시국처는 산서성 남서부
<통고>에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차지했고, 백제 또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을 차지했다”라는 기록과, <송서>에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뒤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해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 차지했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 부른다”라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
<양서>와 <남사>에는 “마한에는 54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뒤에 강대해져서 여러 소국을 아울렀다.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요서와 진평 2개 군을 점령하고는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라는 기록과,
<송서>에는 “백제는 그 치소가 진평군 진평현이며 도성을 거발성(居拔城)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백제군은 곧 진평이며 거발성이고 진평성이다. 마단림이 말하기를 진평은 당나라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백제의 시국처는 낙랑의 서쪽에 있는 대방과 접한 요서군 일대 [이미지=필자제공]
위에서 말하는 요서는 바로 <한서지리지>에서 기록한 유주(幽州)에 속한 요서군을 말하는 것으로, 요서군은 바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인 영제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요서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487 참조)
진평군의 위치는 어디일까?
중국 인터넷자료에서는 진평군은 진안(晉安)군이며 건안(建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 중국의 서남부인 복건성(福建省)이라고 지명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여러 기록에 “백제가 요서·진평 2군을 경략해 차지했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의 영토가 산서성 남부(요서)에서 복건성(진평)까지라는 말인가! 도대체 앞뒤가 맞는 주장을 해야지....
위 <송서>에 마단림이 “진평은 당나라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성과 북평은 도대체 어디일까? 먼저 유성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유성현은 바로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서군에 속한 14개현 중 하나로 서남쪽에 마수산이 있는 곳이다. 즉 산서성 남서부에 있는 요서군에 속한 일개 현이었던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속 유주)。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마수산이 서남쪽에 있는 유성현)。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백제의 요서진출도 [이미지=필자제공]
영락현이 속해 있던 북평군은 요서군에서 분할된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일대이다. 따라서 진평군은 요서군 즉 산서성 남서부 일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북평현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554 참조)
온조가 세운 마수성은 어디인가?
<삼국사기>에 온조왕 8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강하게 나오자, 온조왕이 그렇다면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말해 낙랑과의 평화가 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마수성은 과연 어디일까? 이 마수성을 찾으면 백제의 시국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온조가 쌓은 마수성은 마수산(馬首山)에 쌓은 성이다. 마수산은 위 <한서지리지> 요서군에 대한 설명에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록과,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현토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의 마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토성을 쌓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노룡은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요서군의 비여(肥如)현을 말하는 것이고, <중국지명대사전>에서 마수산을 검색하면 “마수산은 산서성 신강현 서북 40리에 있고, 속명 말머리산으로 현 화염산이다. (马首山 : 在山西新绛县西北四十里,俗名马头山,《张州志》左传赵盾田于首山,即此,一名火炎山。”라고 나온다. 즉 온조가 쌓은 마수성은 산서성 남부에 있다는 말로, 이는 <한서지리지>와 <자치통감> 등의 기록들과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 온조가 쌓은 산서남부 신강현 마수산성은 나중에 안시성이 된다. [사진=필자제공]
그리고 이 마수산은 바로 고구리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왼쪽 눈알을 뺀 고구리의 안시성이었던 것이다. 위 <자치통감>에서 언급한 당나라 때 쌓은 토성은 고구리를 쳐들어온 당태종 이세민이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해 60일 만에 안시성 앞에 쌓은 토산을 말하는 것이다. (안시성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539 참조)
백제의 시조 온조는 마수성을 쌓은 후 5년 후 위례성에서 남쪽 한성으로 천도했다가, 이후 장수대왕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다시 웅진성과 사비성으로 천도하기 때문에 원래 백제의 시국처인 대방고지는 고구리의 땅으로 변하게 된다. 이 잃어버린 옛 땅을 수복하려고 했던 왕이 바로 고구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 근초고왕이었던 것이다.
모든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백제의 시국처는 산서성 남부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할진대 이를 반도사관에 도취되어 서울의 송파구 일대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잘못된 이론일 뿐이다. 만일 위례성이 송파에 있었다면 기록상 반드시 따라붙어야 하는 요서군도 송파 근처에 있어야 하고, 요동군도 그 동쪽 근방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도 성립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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