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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신라인 태후 황자의 숙신정벌 속 확인된 영토

by 고구리역사 202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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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신라인 태후 황자의 숙신정벌 속 확인된 영토

스카이데일리, 신라의 김옥모 태후와 그야말로 뜨거운 세기적 사랑을 나눈 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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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김옥모 태후와 그야말로 뜨거운 세기적 사랑을 나눈 중천태왕이 46세의 나이로 붕어하자, 정윤(동궁)이었던 둘째 아들 약우(若友)태자가 270년 30세의 나이로 등극하니 이가 바로 서천(西川)태왕이다. 초호가 약노(薬盧)대왕이고 모친은 연엽(椽葉)태후이다. 백성을 아끼고 뜻있는 선비를 좋아했기에, 나라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중천태왕의 가계도
 
<삼국사기>에는 중천태왕의 아들로 약우(서천태왕)와 안국군 달가(達賈), 그리고 반역을 일으키는 일우(逸友)와 소발(素勃) 만이 언급되어 있는데, <고구리사초략>에는 서천태왕에게 아들이 훨씬 더 많고 실로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연상의 여인을 좋아한 중천태왕의 가계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① 중천태왕의 장자는 문부(門夫)이다. 산상태왕의 딸로 고모인 통(桶)공주가 동궁(중천태왕)의 상례 시절에 문부를 낳았다고 하는데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다. 문부는 중천태왕이 자기 대신 약우를 동궁으로 삼으려 하자 그 속내를 알아채고는 스스로 물러나 양위한다. 263년 2월 신라 미추왕이 자기 조상 사당에 제사지낼 때 중천태왕이 하사한 향을 전달하는 인물이다.
 
② 둘째 아들은 훗날 서천태왕이 되는 약우(若友)이다. 동천태왕 14년(240) 겨울 12월, 동궁의 봉례 연엽(椽葉)이 나이 14세에 아들을 낳는다. 태왕은 꿈에 백룡이 연불태자(중천태왕)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늘 이상하게 여겨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백룡이 나타났고 약우가 태어난 것이다. 이듬해 가을 8월, 연엽을 태자비로 봉하고 금과 은으로 꾸민 바퀴 달린 가마와 채단을 셀 수 없을 만큼 하사했다.
 
중천태왕 8년(255) 정월, 16살의 약우를 정윤(동궁)으로 삼았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총기가 있고 영민했다고 한다. 약우가 태어날 때 나타났던 그 백룡이 이때에 이르러 또 나타났다. 이에 태왕은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주고 현명한 이를 불러들이고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등용했다고 한다.
 
연엽 황후의 기타 소생으로는 약민(若民, 250년생)과 일우(逸友, 251년생)가 있는데, 일우는 서천태왕 17년(286) 명림전태후의 소생인 소발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 주살되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일우가 서천태왕과 모친은 같으나 부친이 다르다는 불륜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려 말 이성계에 의해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졸지에 신돈의 아들로 둔갑된 경우와 같을 수도 있다.
 
 ▲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신돈의 아들로 둔갑된 우왕과 공민왕 <사진=드라마 정도전 캡처/필자제공>
 
③ 중천태왕의 모후는 명림전(明臨鳣)태후이다. 그런데 중천태왕은 자기 생모의 몸을 통해 자기 자식 여럿을 생산한다. 윤리와 예를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보면 극도의 패륜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형사수취제가 풍습인 북부유목민족인 고구리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형사취수(兄死娶嫂)제는 형·부친이 죽은 뒤에 동생·아들이 형수·부친의 첩을 받아들여 함께 사는 제도이다.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받은 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는 제도이다. 또한 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형수를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중천태왕 2년(249) 10월 전태후는 아들 소발(素勃)을 낳는다. 이 소발이 서천태왕 17년(286) 연엽황후의 소생인 일우와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 주살되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른 불륜의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이외 슬하에 호발(豪發, 252년생)과 보불(宝弗, 254년생)이 있다.
 
④ 신라의 김옥모 황후는 256년 달가(達賈)를 낳는데, 이가 바로 훗날 숙신이 침범해오자 나가 싸워 숙신의 항복을 받고 복속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안국군(安國君)으로 봉해지고 내외병마사를 맡아 겸하여 숙신·양맥을 다스리게 되는 달가인 것이다. 이외 소생으로는 단(檀, 262년생)이 있다. 김옥모의 신라 소생으로는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이 있다.
 
⑤ 잠(蚕) 황후는 250년 아들 약신(若信)을 낳는다.
⑥ 주후(朱后) : 주방(朱邦, 250년생), 주원(朱瑗, 252년생), 주기(朱起, 254년생)
⑦ 관나(貫那)는 250년 공(貢)을 낳는다.
⑧ 신라 김옥모의 딸 월정(月精)은 254년 봉(鳳)을 낳는다. 모녀간에 한 지아비를 둔 경우이다.
 
안국군 달가는 김옥모의 아들
 
신라 김옥모태후와 고구리 중천태왕과의 사이에서 256년에 태어난 달가태자는 부황의 나라에 큰 공을 세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구리로 쳐들어온 숙신을 격파하고 복속시키는 공이다. 그 공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했다는 뜻인 안국군(安國君)에 봉해진다.
 
 ▲ 오하는 태원과 석가장 사이를 흐르는 강 <이미지=필자제공>
 
서천태왕 11년 경자(280) 겨울 10월, 숙신(肅愼)이 쳐들어와 변방의 백성들을 도륙하며 해쳤다. 이에 태왕이 군신들에게 “짐(朕)이 부덕하여 나라의 기틀을 잘못 계승하고 있음이오. 덕은 백성을 편안케 하지 못하고 위엄은 나라 밖으로 떨치지 못해, 이웃하고 있는 적들의 침략을 불러들인 것이오. 장수 될 사람을 찾고 있는데, 누가 적절하겠소?”라고 물으니,
 
군신들이 “아우이신 달가의 지략과 용맹이면 이에 족히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태왕은 달가에게 정벌을 명했다. 달가는 기병을 출전시켜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다가가 공격해 단노성(檀盧城)을 빼앗았다. 이 싸움에서 여자 장수 조환이 전사했는데, 31살이었다. 마침내 그 추장을 죽이고, 그곳에 있던 600여 가를 부여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겨 살게 했으며, 항복한 일곱 부락은 부용토록 했다.
 
단노성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오천은 오하(烏河)로 보이는데 오하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오하: 산서성 우현 남쪽 70리에 있다. 동북으로 흘러 호타하로 들어가고 당나라 때 오하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乌河: 在山西盂县西南七十里,东北流入滹沱,唐乌河县以此名。)”라고 하는데, 오하는 산서성 중부 태원과 하북성 성도 석가장 사이에 있는 강이다.
 
달가는 근본이 신라 김옥모의 소생이어서, 종실들이 그를 대우해주지 않았었다. 이때가 되어 서천태왕이 등용해 큰 공을 세우게 되었고, 그 공로로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를 맡게 하면서 겸하여 양맥과 숙신의 모든 부락을 다스리게 했다. 양맥과 숙신은 이름은 달라도 같은 말갈족이고, 눈하(嫩河)에 살고 있는 자들이 양맥이고 서백리(西伯利)에 살고 있는 자들이 숙신이다.
 
 ▲ 산서성 남부 임분시에서 발견된 金城. 글자가 뚜렷하다 <사진=필자제공>
 
박혁거세의 신라 창업과 관련 있는 눈하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강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박혁거세를 남편 없이 임신한 성모(聖母)가 눈수에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배를 타고 남하해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러 소벌도리라는 자가 데려다 길렀는데, 그 아이가 13세에 이르러 서라벌에서 나라를 세우니 신라의 시조이다.
 
달가가 장수가 되어 양맥으로 떠날 때 아우 돌고(咄固)를 함께 데리고 갔다. 태왕은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훗날 미천태왕)을 품에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전송했다. 당시 을불은 불과 3살이었는데도 달가가 필히 크게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첫 싸움에서 얻은 땅 알하(戞河: 위치 모름)를 을불읍으로 삼고 돌고가 직접 다스리게 했다.
 
서천태왕 22년 신해(291) 5월, 태왕이 안국군의 집에 거동해서 보니, 안국군이 부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진흙탕 가운데 서있기에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안국군은 태왕에게 “치갈(雉葛)은 어리석고 둔하니 보위를 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충고했다. 태왕도 이를 알고는 있었으나, 우황후에게 미혹되어서 폐하지 못하고 있었다. 치갈은 서천태왕의 태자로 다음 보위에 오르는 봉상(烽上)왕이다.
 
반역을 일으키는 일우와 소발
 
서천태왕 6년 을미(275) 가을 9월, 태왕의 동생 일우가 거짓 조서를 내세워 패자 벼슬의 구인이라는 자를 죽였는데, 태왕은 지친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면케 해주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일우는 그런 형님 태왕의 마음을 몰라주고 오히려 훗날 반역을 도모한다. 을불은 나이 아홉 살에 능히 말 타고 활쏘기를 했다고 한다. 하루는 태왕께 “무(武)만을 숭상하고 예(禮)를 모르면 꼭 일우 숙부 같아집니다. 예를 익히고 효를 배우고 싶습니다”라 아뢰었다는 일화가 있다.
 
17년 병오(286) 2월, 태왕이 아우 일우와 소발에게 죽음을 내렸다. 둘은 모두 불륜의 자식이었고 교만방자하고 버릇없기가 이를 데 없어, 태왕이 이를 여러 번 질책했으나 뉘우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무리와 반역을 모의했으며, 칭병하고는 온천으로 가더니 희락함에 절제함이 없었고 내뱉는 말이 패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거짓으로 그를 국상으로 삼는다고 불러들여 붙잡았고, 그 무리들도 주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