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639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연우)에 대해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延優)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라는 짤막한 기록만이 있어 그의 출신과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신대제 9년(173) 계축 정월 5일 궁인 주씨가 연우 태자를 낳았는데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주씨를 마산궁 비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우는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미천한 궁녀가 낳은 서출(庶出)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상왕은 24세에 태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발기의 출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신대제 11년(175) 을묘 발기가 호천에게 장가를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연우가 3살 때 발기가 결혼했으므로 연우보다 최소 십년 이상은 연상으로 보이며, 발기는 신대제의 황후 목씨의 소생으로 고국천제의 동복아우이다. 참고로 고국천제는 155년생이고, 176년 정윤(동궁)이 되었다가 179년 태왕위에 오른다.
그래서 고국천제의 황후 우씨의 농간으로 서출 연우에게 태왕위가 넘어가자 궁궐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서열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라고 호통을 친 것이고,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를 찾아가 “저는 고구려 왕 남무의 동복아우입니다. 남무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내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해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습니다”라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신대제 가계도.
<삼국사기>와는 다른 산상왕의 등극 기록
산상제의 등극에 대한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인용) 산상제의 휘는 연우 또는 위거이며, 신대제의 서자(庶子)이다. 모친 주태후가 꿈에 황룡과 몸을 섞어 교합하였다기에 (신대제가) 그 꿈을 이상히 여겨 바로 그날 밤을 같이한 후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바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외모가 멋져서 (고국천제의) 우(于)황후가 연우를 좋아해 남몰래 상통하였고, 고국천제가 죽으매 초상을 숨긴 채 몰래 연우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가짜조서로써 보위에 세우고 나서 고국천제가 붕어했음을 알렸다. 우황후가 산상제를 맞아들여 고국천제의 유명에 따라 혼인했다.
산상제는 황제의 면포를 착용하고서 황후가 바치는 대보를 받았다. 황후가 절하고 말하기를 “신첩은 대행(고국천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식이 없어 따라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대행께서 이르시기를 ‘당신은 마땅히 내 동생과 혼인해 아들을 낳아 내 뒤를 잇게 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따라죽지 못한 가련한 저에게 조속히 훌륭한 아들을 점지해주시면, 그로써 대행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산상제는 답례로 절하고는 대보를 받고나서 말하기를 “형수를 처로 맞아들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오. 조속히 태자를 낳아 형황(고국천제)께 바치시오”라고 말했다. 이윽고 산상제가 황후를 데리고 천자의 옥좌에 오르자 백관은 산신에게 붉을 밝히며 만세를 불렀다.
▲ 형수인 고국천제의 황후 우씨(아래 사진)를 아내로 맞이한 산상제. <사진=mbc 화면 캡쳐>
적형(嫡兄) 발기의 반란
고국천제의 동복아우 발기는 연우의 적형인지라 마땅히 제위에 섰어야 마땅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까닭에 이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며 사병(私兵) 300명을 데리고 궁궐을 포위하려하자 발기의 처와 아들이 함께 그러지 말라고 극력 말렸다. 그럼에도 발기가 말을 듣지 않자 발기의 처가 궁궐로 달려가 고변했다.
국상 을파소가 “나라의 주인은 이미 정해졌소. 제위를 다투는 자는 적이오”라고 교통정리를 하자, 나라사람들이 산상제를 받들어 발기를 치기로 결정했다. 발기가 와서 보니 궁궐의 문이 굳게 닫혀있고, 사방에는 지키는 병사들이 빽빽이 서있었다. 만궁이 기다리고 있다가 “태왕께서는 우애 있고 어지신 마음으로 이미 당신을 용서하시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다가오시면 후회하시게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발기는 울분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하여 발기를 오랏줄로 묶어 귀양을 보냈고, 그의 군대 모두는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산상제는 형님 발기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모의한 것은 아니라 하여, 죄를 면해주고 배천(裵川)형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발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무리를 이끌고 모반하여 두눌(杜訥) 땅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 서출 동생에게 태왕위가 넘어가자 분노해 스스로 칭제한 발기. <사진=필자제공>
그리고는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소국은 불행합니다. 형이 죽자 형수가 가짜 조서로 동생을 제위에 세웠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손도가 “고구리에서 증모처수(烝母妻嫂)는 일상적인 관습이다. 지금 발기는 형수를 처로 삼지 못하고 이복동생에게 빼앗겨 예법을 따지며 제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때를 틈타 말로는 발기를 돕는 척하면서 기습한다면 그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겠다”라고 말하자,
공손도의 아들(공손연)은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 방비가 튼튼할 것이므로 깊숙이 들어가 치는 것은 가당치 않으니, 발기의 무리와 함께 고구리의 서쪽 변방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도가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 척하며 개마·구려·하양·도성·둔유·장령·서안평·평곽군 등을 급습해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 않았다. 이에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9월 계수가 두눌을 정벌해 그 뿌리를 뽑아버리니, 발기는 배천으로 패주하고는 아들 박고에게 이르길 “나는 적장자인데도 우씨의 거짓놀음으로 서얼에게 쫓겨났고, 나라의 서쪽 땅마저도 공손씨에게 빼앗겼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 말하고는 스스로 목을 칼로 그었으나 아들이 구해 죽지 못했다. 발기가 말하길 “곧 종창이 도질 것이다. 죽지 않으면 무엇 하겠느냐?”라고 말하고는 물속으로 기어가 물에 빠졌다.
발기를 잡으러 뒤쫓아 온 기마병들이 다다랐더니 발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산상제는 왕의 예법에 따라 배령에 장사하여 주고 ‘배천대왕지릉’이라는 비석도 세워주었다. 박고는 무덤을 지키면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고, 자신을 ‘위수(渭水)의 어부’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불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형 공주를 처로 삼아 보내주었다. (인용 끝)
참고로 발기의 아들이 배천에 있는 발기의 무덤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자신을 ‘위수의 아들’이라 했다는 기록은 당시 고구리의 강역이 섬서성 중부를 가로지르는 물길인 위수까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위수는 섬서성 중부를 가로지는 물길.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 기록의 오류 분석
1. 고국천제의 정실 우황후와 시동생 연우는 몰래 상통하는 내연(內緣)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목숨을 걸고 고국천제의 거짓조서를 꾸며 연우를 태왕위에 올린 것이다. 만약 허위 조서라는 것이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우황후와 연우는 대역죄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국상 을파소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잘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2. 증모처수(烝母妻嫂) 제도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계모나 형수·계수를 처로 거두는 제도로 일명 형사취수(兄死娶嫂)제라고도 하는데, 흉노와 고구리·부여 등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형의 재산을 물려받은 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며, 또한 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형수를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형사취수제는 한족들에게 없는 혼인풍습인지라 중국과 조선왕조의 기록에서는 지극히 야만적인 풍습이라 비하하고 있으나, 이는 유교사상에 적은 소중화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고려와 청나라 때까지 행해졌던 우리 민족의 고유 혼인풍습이었던 것이다.
3.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고국천왕이 죽자 우왕후가 발기의 집을 먼저 찾아가 다음 왕위를 계승함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는 기록과, 우왕후가 발기에게 무안을 당하자 그 생각을 접고는 연우의 집으로 갔다는 기록은 우왕후와 연우가 서로 상통하는 내연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산상왕 즉위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임의로 집어넣은 기록으로 보인다. 즉,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기록인 것이다.
▲ 중국이 임의대로 그린 공손씨의 요동 지도. <이미지=필자제공>
4. 적출 형님임에도 우황후의 농간으로 서출의 동생에게 태왕위가 넘어갔으니 발기는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외적의 힘을 빌려 조국을 쳤다는 것은 명백한 역적행위이다. 여하튼 발기의 역모로 인해 고구리는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기습을 당해 서쪽 땅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를 400년 식민지 한사군이 계속 이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다음 연재에서 공손씨의 요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고구리 대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한나라 세력 사이에 끼인 ‘공손씨’ 산서성에 있었다 (1) | 2024.03.07 |
---|---|
중국 황하 서쪽(서하)도 고구려 초 강역이었다 (0) | 2024.03.07 |
두 태왕을 남편으로 섬긴 우황후와 ‘역적 발기’ (1) | 2024.03.07 |
발기(拔奇)의 요동태수 항복기록 ‘삼국사기 오류’ (0) | 2024.03.02 |
한나라 멸망시킨 고국천왕 인재등용 지혜 (1) | 2024.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