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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년 고구리로 쳐들어온 한나라 요동태수를 고국천왕이 직접 출전해 좌원에서 크게 격파하자 한나라는 도처에서 황건적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조조·유비·손권의 삼국시대가 도래한다. 중국의 상징 한나라를 멸망시킨 고구리의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단지 군사력이 강해서만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모든 국가시스템이 중국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축적된 최고의 관리시스템과 이를 운영하는 우수한 인적자원에서부터 정신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국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일례가 바로 고국천왕과 당시 국상 을파소의 경우일 것이다.
촌로에서 일약 국상이 된 을파소
고국천왕 13년(191) 4월,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했으며, 남의 자녀와 토지와 주택을 마구 갈취하는 등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를 사고 있었다. 고국천왕이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해 그들을 처형하려 하자, 좌가려 등이 네 연나부와 함께 모반을 해 거짓조서로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공격해왔다.
태왕은 도성 부근에서 병마를 징발해 친히 반역도당을 주살하고 내부반란을 진압한 후 명을 내리기를 “근자에 총애 여부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으니,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과인이 밝게 처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너희 네 부에 명하노니, 각각 알고 있는 현명하고 양식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네 부에서는 안류를 추천해 그에게 국정을 위임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안류는 자신이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해 큰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며, 자신보다는 을파소를 적극 천거한다고 하자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중후한 예를 갖추어 초빙해 중외대부의 벼슬을 주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있으나, 덕이 없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미숙하다. 선생은 재능을 감추고 총명을 숨기면서 궁색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선뜻 와주니 이는 나만의 기쁨과 행복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홍복이로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니 마음을 다해주기 바라노라”고 했다.
▲ 농사를 짓던 시골노인 을파소를 초빙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고국천왕. <그림=필자제공>
을파소는 역시 거물이었다. 을파소는 비록 뜻은 나라의 부름에 허락했으나 자신이 받은 중외대부라는 직위가 국사를 소신껏 처리해 나갈 정도로 높은 지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 같은 둔재로는 감히 엄명을 완수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택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달성하십시오”라고 사양했다.
고국천왕 역시 큰 그릇인지라 이내 을파소의 뜻을 알아채고는 그를 국상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의 친척들은 이름도 없고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시골노인 을파소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자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국천왕이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멸하는 죄를 주겠노라”라고 명령했다.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일상적인 도리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옛날의 은거를 생각하겠느냐?”라고 말하고는 지성으로 고국천왕을 받들어 정치와 교육을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에게도 “만일 그대가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그대의 공로다”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대사자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을파소는 2세 유리명왕 때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으로, 성정이 강직하고 굳세며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나와 등용되지 않아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밭을 갈며 농사지으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재주와 능력은 비상했으나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고국천왕이라는 현군을 만나 그가 품었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상례를 따지지 않았으며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은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의 유비는 제갈량에게, 진나라 부견은 왕맹에게 그러하였다. 이러한 연후에야 직위에서 현명함과 능력이 발휘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이루어져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임금이 결연히 독단을 내려 을파소를 초야에서 발탁하고 중론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임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라고 논하며 고국천왕이 을파소라는 명재상을 발탁한 것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을파소상은 청렴하고 존경받는 공직자상을 확립하기 위한 상. <사진=필자제공>
빈민구제책을 시행한 을파소
고국천왕 16년(194) 태왕이 사냥을 가다가 길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자를 보고 “어째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신은 가난해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데 올해는 농사가 잘 안 되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니 한 말 한 되의 양식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고국천왕은 “내가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백성들을 이런 극단에 이르도록 했으니 나의 큰 허물이로다”하고는 그에게 집과 먹을 것을 주어 위로하고는 이내 관원에게 명령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과 늙고 병들고 가난해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조사해 구호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실시한 진대법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최초로 시행한 사회보장제도이다.
진대법은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게 양곡을 대여해주는 제도로서 진(賑)은 흉년에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주는 것을 말하고, 대(貸)는 3월부터 7월까지 관청에 있는 곡식을 대여하고 가을 추수 후 10월에 회수하는 것을 뜻한다. 진대법도 가족의 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구제양곡을 빌려주고 갚도록 했다.
그런 좋은 세상이 되다 보니, 고국천왕 19년(197년) 한나라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살기 힘들어진 한나라 백성들이 (살기 좋은) 고구리로 몰려와서 몸을 의탁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 어린이 동화책에 그려진 을파소의 진대법. <사진=필자제공>
이처럼 현명하고 훌륭한 군주였던 고국천왕은 이름이 남무 또는 이이모(伊夷模)로 신대왕의 차자로 원래 왕위계승권자인 태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키가 9척이나 되고 외모는 크고 늠름하였으며, 힘은 능히 큰 가마솥을 들어 올렸으며, 정사에 임하여서는 들어주거나 끊어냄에 있어서 아량과 엄격함이 적절하였기에 선왕인 신대왕이 차자인 고국천왕을 후사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처럼 현명했던 고국천왕의 왕위 계승에 대해 이상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다음 연재에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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