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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구리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태후들이 미천태왕 때 많이 죽는다. 대표적인 태후가 봉상왕을 보위에 올린 우태후와 미천태왕의 모후인 을태후이다. 그 중 을태후는 마치 조선왕조 성종 때 인수대비와 같은 존재였다. 남편 돌고는 태왕이 되지 못했으나 아들 을불이 태왕이 됨으로써 태후가 되는 여인으로, 미천태왕 즉위 19년 동안은 을태후가 고구리를 통치하던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 봉상왕을 보위에 올린 우태후의 죽음
미천태왕 4년(303) 계해 5월, 폐위된 봉상왕의 모후 우(于)태후가 춘추 61세에 죽었다. 산상제의 딸 통공주와 우수의 소생인 그녀의 이름은 오두(五斗)였고, 중천태왕 9년(256) 약우(서천제)가 황태자 시절 비가 된다. 통공주는 일찍이 동궁상례 시절에 장자 문부를 낳았는데 문부가 덕이 있어 약우에게 황태자위를 양위했기에, 중천태왕이 대신 통공주의 딸을 정연(동궁)으로 삼아 그녀의 마음을 위로한 것이다.
황태자비 우씨는 명랑하고 예뻤으며 노래를 잘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부황을 모셨기에 궁중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나, 황후가 되자 아들 치갈(봉상왕)을 돕고 비호해 임금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서천태왕의 총명함을 가리고 치갈의 어리석은 욕망을 부추겼으며, 서천태왕이 갑자기 죽자 꼭꼭 숨기고는 발상도 하지 않은 채 우선 안국군 달가의 병권을 빼앗아 자기형제들에게 넘겨준다. 그리고는 거짓조서로 봉상왕을 보위에 세웠고, 안국군 달가를 죽인 것 모두가 역시 우태후의 음모였다.
급기야 국정을 전횡했고 황음하며 사치하기를 좋아해 궁실이 간사한 무리로 가득 찼으니, 이 모든 것은 태후가 나라를 상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좀먹은 탓이라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되어 있다. 즉, 우태후는 악(惡)태후였던 것이다. 황후가 붕어한 태왕의 발상을 숨기고 임의대로 다음 태왕을 정한 경우는 고국천왕의 우황후가 처음이고, 서천태왕의 우황후가 2번째이다. 공교롭게도 두 황후 모두 于씨였다. 고국천왕의 우황후는 연인이었던 산상태왕의 황후가 되었고, 서천태왕의 우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 황후가 다음 임의대로 태왕을 정한 첫째 경우가 고국천제의 于황후이다. [사진=필자제공]
창조리를 위시한 신하들이 후산에 모여 을불을 옹립한 일을 태후가 용납하지 않자 군사들이 태후를 죽이려 했으나, 미천태왕은 그녀가 서천태왕이 사랑했던 황후였다는 이유로 보호해주고 받들어 모시기를 예전과 다름없이 했다.
12공신의 하나인 재생이 여러 번 발걸음을 해 태후와 치붙었고, 그녀의 아들 상해와 음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태후가 걱정스럽고 두려워해 앓다가 죽은 것이다. 미천태왕은 그녀를 가련히 여겨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봉상왕 곁에 묻어주었다. 서천태왕 곁에 묻어주려 했으나, 조정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커서 그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천태왕의 조모 고태후의 죽음
미천태왕 7년(306) 병인 봄 2월, 돌고대왕의 생모 고(高)태후가 춘추 65세에 돌아가셔서 서천릉에 장사지냈다. 고태후는 중천제 시절 동궁조의의 처였다가, 서천제에게 잠자리를 바쳐 미천태왕의 부친인 돌고를 낳은 후 소후로 올려졌다. 서천태왕이 붕어하자 간신 원항에게 몸을 더럽히는 능욕을 당하고 심한 위해도 여러 번 겪었다.
미천제가 즉위하자 태황(太皇)태후로 올려져 백룡원에 기거했다. 무척 아름답고 점잖고 묵직해 말 수가 적었으며, 큰일들을 깨우치고 있어서 미천제를 위해 치욕스러움을 참아내며 끝내 중흥의 공을 세우니 마침내 서천제의 짝이 되어 곁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판 인수대비 을태후의 죽음
미천태왕의 모친인 을태후는 아들이 즉위하자 단림(檀林)태후로 높여진다. 을태후의 부친 을보는 국태공이 되고, 오빠 을로는 우보(우정승)가 된다. 미천태왕 2년(301) 봄 정월 태왕이 을태후의 궁에서 조례를 받았는데, 큰 정책들이 태후로부터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 이는 마치 조선왕조 성종의 모후였던 인수대비처럼 국가의 정책들을 을태후가 결정했던 것이다.
을태후는 성품이 총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으며, 안색은 예쁘고 고왔으며 키는 7척이나 되었다. 노래하며 춤추며 놀기를 잘했고, 망령된 명을 내리는 바람에 사람들을 희・노・비・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두루 녹여내는 재주가 있어 권력이 있거나 귀한 자들을 진흙 주무르듯 했다. 대업을 몰래 도왔다가 미천태왕이 즉위한 후 단림태후에 오르더니, 조선왕조의 인수대비처럼 정사에 끼어들어 일을 그르친 것이 많았고 이를 말릴 수도 없었다.
▲ 왕비는 아니었으나, 아들 성종이 왕이 되자 대비가 된 인수대비 [사진=드라마 캡쳐]
또한 금인(金人)을 주조했고 사신(私臣) 즉 정부(情夫)가 많아 황음하기를 일삼으니, 나라사람들이 을태후를 매우 천하게 여겼다고 한다. 일예로 을태후는 좌보 우탁(于卓)과 관계를 맺어 아들 우달을 낳는다. 미천태왕이 우달의 딸 잠(潛)을 총애해 궁인으로 거두었는데, 30년(329) 2월에 잠이 아들 림(琳)태자를 낳자 후에 봉해진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천태왕을 옹립했던 12공신의 한명인 태보 선방은 군신간의 예절을 잘 알지 못해 자기 처처럼 을태후에게 치붙었다. 죽음에 임박한 태후가 선방에게 따라 죽으라고 명하자, 태왕은 그가 중신임을 들어 작은 예절을 따라 죽을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의 순사를 막아주었다. 19년(318) 무인 가을 7월, 을태후가 춘추 58세에 죽어 돌고대왕릉에 장사지냈다.
어느 날 태후가 선방의 꿈에 나타나 약조를 어긴 것을 책망해 마음이 항상 찜찜했는데, 근자에 꿈에 태후가 노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의 뿌리를 뽑아버리자 병이 심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태후의 영령이 그리 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외척 을보와 을로의 죽음
미천태왕 2년(301) 신유 2월, 을태후의 부친 태공 을보가 71살에 죽었다. 을보는 고국천왕 때 명재상 을파소의 서자 소개가 주통태후(동천태왕의 모후)를 찾아오는 손님을 태후에게 안내하는 벼슬을 하다가 태후와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봉상왕 때는 근신해 자신을 지켰고, 미천제가 즉위한 후 을태후가 국정을 주무르자 을보는 이를 경계하며 일절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왕의 예로 주통태후릉에 장사지냈다. 아들들인 노(盧)・원(源)・향(向)・량(良)・민(閔)・칠(七) 및 패(沛) 등은 을씨 집안의 일곱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6년(305) 을축 정월, 을태후의 오빠 좌보 을로가 죽었다. 그는 모나게 처신하지 않아서 오를 벼슬자리가 없으면 오로지 신을 섬김에 착실했고, 주색에도 신중해 사람들이 그를 꺼려하지 않았다. 봉상왕 시절엔 오로지 구차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었고, 미천태왕 즉위 초에는 부친 을보가 맡은 우보의 일을 대신하며 상부에 머물면서 종일토록 수염을 쓰다듬을 뿐이라 사람들은 그를 무수재상(撫鬚宰相)이라 불렀다.
부태후의 죽음
29년(328) 무자 5월, 상보의 처로 초(草)후를 낳은 부(芙)태후가 66세에 죽었다. 을분과 정분이 있던 딸 초씨가 봉상왕에게 승은을 입고 입궁한 후 그녀 역시 승은을 입어 아들을 낳자 소후로 봉해진다. 미천태왕 즉위 후 태후로 봉해졌으며 바퀴가 달린 가마로 출입하며 을태후에게 의지했었으나, 을태후가 죽자 혼자 태후로 있었다. 태왕은 부씨들이 융성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돌보아준 것이었는데, 부태후의 아비 부포는 비류(沸流)에서 유별난 호걸이었으며 고구리 초기의 명장 부분노(芙芬奴)의 후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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