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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수(長壽)한 임금을 꼽으라면 흔히 고구리 20대 장수태왕과 조선왕조 21대 영조를 떠올린다. 존호에서 장수했음을 알 수 있는 장수태왕은 79년간 재위에 98세까지 살았으며, 영조는 52년간 재위에 84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이 두 임금보다 훨씬 더 장수한 임금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구리 6대 태왕인 태조대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은 94년간 보위에 있었고 119세의 나이에 붕어했으니 역대 임금 중에서 장수로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과연 94년간이나 정사를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임금이면 술과 여자 등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많았을 터인데 119세까지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그랬는지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의 정체는?
고구리로 쳐들어온 10만 대군을 몰살시켜 한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국상 명림답부가 신대왕 15년(179) 9월 113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자 동년 12월 신대왕이 91세의 나이로 붕어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리사초·략>에는 명림답부가 52세에 갑자기 죽자 신대왕이 59세에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옳은 걸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55년 모본왕이 시해되자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 태조대왕이 6대 태왕위에 오른다. 나이 7살이라 태후가 수렴청정 했고 94년간 재위에 있다가 77세인 동복아우 차대왕에게 양위한다. 차대왕은 20년간 재위에 있다가 165년 태조대왕이 119세로 붕어하자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한다. 이어 태조대왕의 막내아우 신대왕이 77세에 8대 태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구리 초기 왕통 연대기. ⓒ스카이데일리
이는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형인 태조대왕과 아우인 차대왕·신대왕의 나이차가 24살과 42살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조대왕이 즉위하고 17년 후에 차대왕이 태어나고 35년 후에 신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인바 그 때까지 아버지 재사가 살아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재사가 살아있었다면 7살짜리 태조대왕 대신 어른인 재사가 당연히 태왕이 되었을 것이고, 설사 태왕이 되지 못했더라도 조선말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처럼 섭정을 했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는 것은 당시 대원군이 이 세상에 없었다는 말인데, 그런 상태에서 태조대왕 즉위 35년 후 동생 신대왕이 태어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구리 초기왕력이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4년 대무신제가 붕어하자 태자(모본)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내려 민중제가 즉위했다가 5년 후 붕어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대무신제의 서자인 재사를 보위에 올리려 했으나 “적자가 있는데, 서자가 감당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피해 달아나자 모본제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이복동생 재사를 선왕(仙王)으로 봉했다.
73년 모본제가 시해되자 재사가 태왕위에 추대되어 연호를 신명(神明)으로 고쳤고 40년간 재위하다 112년 45세의 태자(태조대왕)에게 선위하고 물러났다가 121년 붕어한다. 태조대왕은 35년간 재위하다가 79세인 146년 태왕위를 동생 수성(차대)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가 165년 98세에 붕어한다. 이해 차대왕이 시해되고 태조대왕의 서자 신대제가 즉위했다가 15년 후인 179년 59세에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위와 같기 때문에 장수태왕에게 가장 오랫동안 보위에 있었다는 의미의 장수(長壽)라는 존호를 올렸던 것이다. 만일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태조대왕이 79년간 보위에 있었고 119세까지 살았다면 아마 장수태왕에게 그런 존호를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태조태왕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처럼 35년간 재위하고 98세에 붕어한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막내아우가 아니라 아들이 되어야 역사적 연대가 맞을 것이다. 따라서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는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니라 대무신왕의 아들이 되어야 하며, 재사는 태조대왕의 대원군이 아니라 신명제라는 태왕위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왼쪽)의 고구리 초기 왕력. <자료=필자제공>
결국 <삼국사기>는 고구리의 왕통을 정확하게 모르는 중국기록을 참조해 인용하다보니 이런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이런 오류는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함께 고구리의 민족반역자로 꼽히는 발기(發岐)에 대한 기록에서 또 보인다. 역적 발기라는 인물을 분석해보면 오류임이 확연해진다. (다음 연재에서 설명할 예정)
179년 신대왕이 붕어하자 아들 고국천왕이 즉위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대신들은 장자 발기(拔奇)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이이모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함을 원망해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한 뒤 돌아와 비류수가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 한나라에서는 더 이상 못 살겠다며 농민들이 떨쳐 일어난 황건기의. <자신=필자제공>
한나라를 멸망하게 한 고구리 고국천왕
<삼국사기>에 “고국천왕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태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태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베어버린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리사초·략>에서는 이를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고 했다.
12년 전 10만 대군을 전멸시킨 명립답부의 좌원대첩의 여파로 멸망의 깊은 늪으로 들어서게 된 한나라는 이 좌동친전이 치명타가 되어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드디어 일명 ‘황건적의 난’으로 알려진 대규모 농민봉기인 황건기의(黄巾起義)가 한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황건이 의로움으로 일어났다는 의미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 19년(197)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해 귀순하는 한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거늘, 한사군이 B.C 108년부터 400년간 줄곧 한반도에서 존재했다는 이론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지 큰 의문이 든다. 한사군은 그야말로 엉터리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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