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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한민족사의 애틋한 사랑에 눈먼 공주 이야기

by 고구리역사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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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한민족사의 애틋한 사랑에 눈먼 공주 이야기

스카이데일리, B.C 195년 최숭이 세운 낙랑국은 북부여의 마한에 조공을 바치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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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95년 최숭이 세운 낙랑국은 북부여의 마한에 조공을 바치던 부속국이었다. 이후 227년의 세월이 흘러 최숭의 후손인 최리(崔理)가 낙랑국을 다스리고 있었고, 당시 고구리는 대무신왕이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당시 낙랑국은 상국인 고구리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조공도 제대로 바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낙랑공주의 죽음과 낙랑국의 멸망
 
고구리 대무신왕은 최리가 다스리던 낙랑국을 쳐서 없애려 했으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낙랑국에는 적군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이 있어 상대의 침공을 미리 알고 방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아무리 소국이라 할지라도 미리 대처하면 큰 적도 막아낼 수 있는 법이다. 그 북과 나팔은 이름 하여 자명고각(自鳴鼓角)이라고 한다.
 
 ▲ 드라마 자명고의 포스터. <사진=SBS>
 
대무신왕 15년(32) 여름 4월 호동왕자가 옥저 지방에 놀러갔었는데 그 때 마침 낙랑국왕 최리가 순행하다가 호동을 보고는 “그대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니오?”하고는 호동을 도성으로 데리고 돌아가 사위로 삼는다. 아마 낙랑국왕 최리는 상국인 고구리와의 관계개선을 무척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호동이 귀국한 다음 몰래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만약 그대가 그대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찢고 부순다면 내가 예로써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낙랑국을 치려고 낙랑공주로 하여금 낙랑국의 최첨단장비인 자명고각을 부수도록 한 것이다.
 
이에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먼 낙랑공주는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숴버리고는 호동에게 알리니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낙랑국을 습격하도록 권유했다. 낙랑국왕 최리는 자명고각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고구리 군사들이 쳐들어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고구리 군사를 보고 난 후에야 고각이 부서진 것을 알고 공주를 죽이고 나와 고구리에 항복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낙랑국을 멸망시키려고 낙랑공주를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고 하여 고구리가 낙랑공주와의 혼인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록도 함께 싣고 있다. 호동왕자는 겉으로만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낙랑공주는 진심으로 호동왕자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목숨을 걸고 자기나라의 자명고각을 부순 그녀의 행동이 증명해준다 하겠다.
 

 

 
 ▲ 낙랑공주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SBS 대하사극 자명고에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고 있는 장면(위)과 낙랑공주가 처형되는 장면. <사진=영상 캡쳐>

낙랑국왕 최리가 항복하고 5년 후인 A.D 37년 대무신왕이 다시 낙랑국을 습격하여 없애버린다. 아마 최리가 항복하고 난 후 다시 역심을 품었거나, 낙랑국의 다른 잔존세력들이 다시 반기를 든 것이 아닌가 한다. 엄연한 우리민족의 역사로 역년 227년의 낙랑국은 이렇게 자명고각이 망가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호동왕자의 자살
 
한편 호동왕자는 큰 어머니(대무신왕의 정비)와의 갈등으로 자살하고 만다. 호동왕자는 둘째 왕비의 소생인데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대무신왕이 무척 총애했다고 한다. 그러자 첫째 왕비는 대무신왕이 호동왕자를 태자로 삼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하지도 않을뿐더러 제게 음란하기까지 합니다”라고 음해하자, 대무신왕은 “네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미워하느냐?”고 다그쳤다.
 
왕비는 대무신왕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데다가 나중에 화가 자신에게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일이 없다면 제가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고하니, 대무신왕이 이를 믿고는 호동에게 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하기를 “왜 부황에게 해명하지 않느냐?”고 하니 호동은 “내가 해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부황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이를 효도라 하겠는가?”하며 칼에 엎드려 자결하고 만다.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
 
대부분 사람들은 잘못된 역사상식으로 인하여 흔히 낙랑 하면 무조건 한 무제가 우거 집단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낙랑국의 임금인 최리를 한나라 낙랑태수라 하고, 낙랑공주도 공주가 아닌 그냥 태수의 딸 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왜곡된 역사에 길들여져 있어 우리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 중국이 그린 신나라 강역도. 겨우 15년 존재한 신나라가 한반도 낙랑군을 계승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지=필자제공>

낙랑국은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과는 전혀 다르다. 한사군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설령 잠시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현 중국의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지역에 있었다. 그런 한사군이 한·중 역사교과서에는 한반도 북부로 옮겨져 있다. 이는 뒤틀리고 왜곡된 기만과 허구로 날조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중화사대사상과 일제식민사학을 아직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낙랑국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았듯이, 낙랑국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즉 전한과 왕망의 신나라(8년~23년)가 존재할 때까지의 낙랑은 중국의 식민지 낙랑군이 아닌 우리 역사의 낙랑국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