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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원래 어디인가
지금까지 수양산은 학자들마다 주장이 달라 각각 하북성 노룡현 또는 감숙성,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 심지어는 조선왕조의 어떤 학자는 황해도 해주 등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중국지도 및 백과사전에도 6군데의 수양산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얼마 전 필자가 산서성 서남단 황하변에서 진짜 백이·숙제의 무덤을 발견함으로써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잘못된 것임이 백일하에 밝혀지게 되었다.
수양산이 어디인지 가장 확실하게 밝힌 기록은 <사기 집해>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지방의 포판에 있는 화산의 북쪽에 있고, 그곳은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하동(河東)은 황하의 동쪽으로 지금의 산서성을 말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라는 설명이다.
위 기록을 입증해주는 고지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청광여도(大淸廣餘圖)로 거기에는 황하가 꺾이는 동쪽에 수양산과 포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며, 백이·숙제의 묘라는 글자까지 그려져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무도 그곳을 가본 한국인이 없어서 그런지 그 지도에 그려진 백이·숙제 묘가 맞다고 언급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가보지도 않고 지금까지 조작된 중국지도만 보고 다들 엉뚱한 주장만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 (위)<사기집해>에서 마융의 말대로 황하 굴곡지점에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묘와 포판이 그려져 있다. (아래)<대청광여도>에 산서성 서남단 황하 꺾이는 지점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묘. <이미지=필자제공>
수양산은 우리 고대사의 지명을 밝히는 열쇠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우리 (단군)조선과 고구리의 남쪽 강역과 고대지명을 밝히는데 있어 핵심 중의 핵심 열쇠인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설문에서 전하기를, 수양산이 요서에 있다(說文云首陽山在遼西)”는 기록 때문이다. 설문이란 <설문해자>를 말하는 것으로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한자사전이다.
또한 백이·숙제의 고죽국에 관한 기록은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에 속한 요서군(遼西郡)에 대한 설명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참고로 아래 영지(令支)현은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서부 영제(永濟)시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진나라 때 설치되었고, 작은 하천이 48개가 있는데 총 3,046 리이다. 유주에 속한다. 가구 수는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 14개현이 있다. 해양, 신안평, 유성, 영지, 비여, 임유현 등이다. 마수산은 유성현 서남에 있고,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 현수가 비여(=노룡) 동쪽에서 유수로 들어가고 유수는 남쪽에서 해양현으로 들어간다. 당취수(압록수)는 도하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위)<현대 지도>에 그려진 산서성 서남단 황하 굴곡지점에 있는 백이·숙제 묘. (아래)산서성 서남단 황하 굴곡지점에서 발견된 백이와 숙제의 실제 무덤. <이미지·사진=필자제공>
우리가 국사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요동·요서는 현 서만주의 중심도시 심양을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과 서쪽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의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과 일제식민사학자들에 속아 그렇게 알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의 진실로 볼 때 산서성 남부의 운성시 서쪽에 있는 영제시 일대가 바로 백이·숙제가 왕자로 있던 고죽국이었고, 북부여와 고구려 때 요서군(遼西郡)으로 불렀던 것이다.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 영토로 고대 중국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전 컬럼에서 언급한 <사기>의 기록에 제나라 환공이 “나는 이미 남으로 소릉까지 원정하여 웅산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과 이지와 고죽(孤竹)까지 토벌했다. 서쪽으로는 대하를 토벌코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고 말함이 성립되는 것이다. 소릉(召陵)은 황하남부 하남성 정주시 남쪽에 있는 탑하(塔河)시이다.
▲ 산서성 남부의 운성시 서쪽에 있는 영제시 일대가 바로 백이·숙제가 왕자로 있던 고죽국이었고, 북부여와 고구려 때 요서군(遼西郡)으로 불렸던 곳이다. <이미지=필자제공>
따라서 고대 중국과 우리의 국경선을 산서성과 하남성을 흐르는 황하로 봄이 옳다고 할 것이다. 즉,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또는 섬서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단군)조선과 고구리의 남쪽 영토가 황하까지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요서군을 상징하는 고죽국 백이·숙제의 무덤인 것이다.
고죽국의 땅 = 기자의 봉지 = 한사군의 땅 = 고구려의 땅
<수서 배구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황문시랑 배구가 글을 올려 수나라 양제에게 고하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의 땅으로, 주나라 때에는 기자에게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습니다” 했다. 즉, 고죽국이 있던 요서지역이 바로 기자의 봉지였고 한사군의 땅이었으며 나중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대명일통지>에 의하면, “영평부 15리에 고죽군의 나라로 봉한 땅이 있다. 또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고 말한다. 이곳은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 이곳 가까운 곳에 고죽국이 이웃하고 있었다(大明一統志: 永平府十五里。有孤竹君國所封之地。又曰。朝鮮城在永平府境內。「箕子」受封之地。以此有與孤竹國爲鄰)”고 기록되어 있어 고죽국과 기자의 봉지(한사군)가 서로 인접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산서성 남부 황하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또한 <괄지지>에 따르면, “고죽의 옛 성은 노룡현 남쪽 20리에 있다. 지금의 영평 지방 18리에 있는 보(堡)이다. 즉 옛 노룡새이다. 영평부는 한나라의 우북평이다. 백이·숙제의 사당이 영평부에 있다. (《括地志》所云。孤竹古城在盧龍縣南十二里。今永平地方十八里堡。卽古盧龍塞也。永平府卽漢之右北平。夷.齊廟在永平府)”는 기록이 있어 고죽성이 있는 노룡현과 영평부와 우북평은 모두 근처에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 (위)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고성에 영펑부라는 비석을 박아놓고 이곳을 기자성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조선왕조 때 평양에 조성된 기자의 묘. 조선왕조 때 역사왜곡의 도가 더 심하다. <사진=필자제공>
이러한 고죽국을 조선왕조 때 이첨은 <동국여지승람>에서 “고죽국은 지금의 해주이다. 중국 조정의 영평부에 고죽의 고성이 있다. 이첨은 해주가 고죽국이 있던 곳이라 했다. (而《輿地勝覽》。「李詹」云。孤竹國今海州也。中朝永平府。有孤竹古城。而「詹」乃以海州爲孤竹國。”라고 했으니 조선왕조 학자들의 역사왜곡이 중국보다 도를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노룡현의 역사연혁에 따르면, “노룡현은 본래 은나라 고죽국(孤竹國)이었다. 한나라에서는 비여현(肥如縣)으로 하여 요서군에 예속시켰으며, 후위에서는 요서군과 평주의 치소로 하였고, 또 신창현을 붙여 북평현치(北平縣治)로 하였다. 북제에서는 요서군을 폐지 북평에 편입하였고, 수나라에서는 비여현을 폐지하여 신창에 편입시켰다가 뒤에 신창을 고쳐 노룡(盧龍)으로 했고 다시 노룡을 고쳐 비여라 했다. 당나라에서는 또 노룡으로 고치고 이어 평주치로 하였으며, 요나라에서는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지명이 등장하나 거의 은 지역으로 즉 이 지역은 산서성 남부의 서부인 영제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 산서성 서남단 황하굴곡지점에 있던 고죽국이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다. 우리의 고대강역에 산서성과 내몽골과 하북성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미지=필자제공>
참고로 수양산은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의 서쪽 기점이며, “<대동운옥>에 의하면 고려에서 송에 보낸 표문에 고죽국은 ‘부상’의 옛 경계에 고죽국의 유지(遺地)가 있었다 (<大東韻玉> 高麗上大宋表. 扶桑舊境. 孤竹遺基)”로 기록되어 있어 고죽국이 부상국과의 옛 경계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참으로 고죽국은 우리 역사의 고대지명을 밝히는 열쇠 중의 열쇠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식민사학계는 일제의 영향을 받아 (단군)조선은 신화이며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뿐이었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즉, 학생들에게 우주처럼 광대한 꿈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군화발에 찌그러진 축소지향의 잘못된 식민지 역사관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 국사교과서가 바뀌는 날이 빨리 와야 위대했던 민족의 영광이 재현되고 민족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다음 연재는 (6부)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위치에 대해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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