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카이 이전

광개토태왕의 '아리수(압록강)'는 어디인가?

by 고구리역사 2023. 8. 2.

https://www.pluskorea.net/sub.html?page=134&section=section78&section2=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완도 약산 해안 치유의 숲, ‘여름철 걷고 싶은 숲길’ 선정

www.pluskorea.net

기사입력 2009/01/20 [14:41}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4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고구려의 초기 강역으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
(2부) 두 무덤(이제묘)이 밝혀준 고구려의 강역
(3부) 광개토태왕 비문의 염수와 토곡은 어디?
(4부) 덕흥리 고분으로 본 광개토태왕의 강역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들은 중국에서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게다가 일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역사왜곡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우리의 위대한 역사인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이 엄청난 음모에 이론적으로 전혀 대항을 못하고 있다. 

단지 우리 정부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동북공정에 대해 욕하고 울분을 토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 이유는 이 나라 사학계의 이론이 일제의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의 역사교과서 이론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고 막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밝히고 새롭게 조명해야만 중국의 역사 침탈을 막을 수 있다 하겠다. 그 위대한 고구려 역사 회복의 핵심에 광개토태왕이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의 강역을 제대로 밝힘은 고구려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요, 우리 역사의 진실의 전부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 강역

우리는 흔히 광개토태왕을 동양의 알렉산더대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은 알렉산더대왕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후에 몽고의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단군과 광개토태왕의 후예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실체를 밝힘에 있어 가장 애로사항은 사료의 부족이라 하겠다. 중국은 얼마나 광개토태왕에게 초토화 되었는지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 아예 두려움의 대상인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업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이 쓴 고구려의 사서도 현재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고구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광개토태왕의 진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500년과 일제 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변조 왜곡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광개토태왕 시절의 최대 강역을 밝히려면 그 이전의 고구려의 강역을 알아야 한다. 

▲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의 영토. 일제가 그려준 그 지도 그대로 아직까지 우리 교과서에 실려있다.  


1. 고구려의 초기 강역 확장

고구려는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이었던 추모대제(주몽)가 B.C 37년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다. 추모대제(주몽)은 년호를 ‘다물’로 하여 활발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황제들은 추모대제의 뜻인 다물정신을 이어받아 고토였던 광활한 단군조선의 강역의 회복을 국가의 기치로 내걸었다.  

2대 유리명제를 거쳐 3대 대무신제로 오면서 단군조선의 옛 강역을 상당히 회복한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의 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 모본왕 2년(A.D 49년) 기사로 나와 있는 한의 북평, 상곡, 태원, 어양을 습격하였다는 기록이고, 개마를 토벌하고 동부여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의 옥저와 낙랑군의 정벌이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한단고기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식민사학의 이론을 따라 이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아래 한단고기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이 지명들은 수양제와 당태종과의 전쟁 시 다 나온다)
* 당태종이 도망가다 빠진 요택은 현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황하습지로 보인다.

▲   현 지명대로 민족사학계가 그린 북경 동쪽 요서 10성의 지도. 이것도 중국의 지명조작에 완전히 속은 지도이다.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에는 대무신제 28년(65년) 개마(盖馬), 구려(句麗), .... 서안평(西安平)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위 요서 10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쌓은 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서안평이라는 중요한 지명이 있다. 서안평(西安平)은 한과 고구려가 국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충지로 사서에 숱하게 나타나 서로 뺏기고 빼앗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8대 신대제 때는 “한나라 대군(10만)과 싸워 말 한 필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명림답부의 좌원대첩과 고국천제 때에는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같이 쌓였다”라는 좌원친전이 있었다.  

<고구려사초.략> 13대 서천대제 5년 기록에 “진(晋)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平州)로 삼았다. 일설에 범양, 상곡, 북평과 요서를 말하고, 또 일설에는 창려, 요동, 대방, 낙랑, 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다. 교위, 태수, 참군을 허설하였으니 역시 웃을 일 아니겠는가?”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진(晋)나라는 실제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고구려 일부 영토의 행정구역 개편과 관리를 임명했다는 역사왜곡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하겠다.  

2. 고구려의 불우한 시기

고구려에 화려한 과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양대제(동천왕 19년 AD246년)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도성인 환도산성이 함락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고구려는 미천대제의 중흥기를 맞이하다, 고국원제가 41년(AD371년)에 백제의 영웅인 근초고/근구수왕에게 평양성에서 전사를 당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   1906년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  이 유물로 인해 집안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지로 변조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다르다. 관구검은 집안까지 오지 않았고 산서성 남부에 있는 환도산성을 함락시킨다.  관구검기공비는 고의로 중국이 옮긴 것이 확실하다.

 
백제 근초고/근구수왕에게 남쪽의 많은 강역을 잃고 북으로 밀려난 고구려는 소수림제와 고국양제의 중흥기를 거쳐 드디어 민족의 대영웅 광개토대제가 나타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즉위하자마자 처음 치르는 전투가 그 유명한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진사왕은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사냥터에서 듣고 놀라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3.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 나타난 고구려의 기록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
고려는 본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 동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가 있다. 서북에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이 있다.  

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 而赢随山屈缭为郛, 南涯浿水,王筑宫其左。
그 나라 임금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컫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이었다. 경사(장안)로 부터 오천리(? 과장)를 가면 산을 따라 굴곡지게 휘감으며 성곽을 이루고 남쪽 끝에는 패수가 있다. 왕은 북쪽(좌)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
또한 국내성,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압축해서 지리비정을 간단히 하면 압록수는 마자수라고도 부르며, 그 동쪽에 국내성이 있고, 서남쪽으로 안시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즉 압록수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요동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틀리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압록수가 어떤 강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분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으로 검색을 하면 이상한 기록이 나타난다.

汾河 : 源出河南商水县西,东流龙项城至沈丘县西入濄河。汾水亦曰汾河。
분하 : 하남 상수현 서쪽에서 나와 용정성으로 동류해 심구현 서쪽의 과하로 들어간다. 분수는 옛 분하이다.


▲ 산서성의 주 강인 분하가 원래 하남성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 고금지명대사전. 그렇다면 현 분하의 원래 이름은? 그것은 바로 압록수(아리수)인 것이다.


이 기록은 현 산서성의 주 강인 현 분하가 옛날에는 하남성에 있었단 말이다. 상수현, 심구현, 과하를 검색해도 모두 하남성으로 나타난다. 즉 산서성에 있는 현 분하는 옛날에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이름이란 다름 아닌 '압록수(아리수)'인 것이다.  

압록수를 현 분하에 가져다 놓고 위 신당서의 지리비정을 하면 아래의 지도와 같아진다. 희한하게도 신당서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서안평을 운성시 하진시로 보이며, 안시성은 여량산맥의 남단으로 보이며, 그리고 산서성의 주 도시들인 후마, 임분, 평요, 태원 등이 모조리 압록수의 바로 동쪽에 있으니, 고구려의 평양성과 국내성도 이 도시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한서지리지에 압록수는 2,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현 분하의 길이인 716Km와 크게 차이가 없다. 즉 중국과 일제는 이러한 지명 조작을 통해 우리의 역사 강역을 축소시키고 왜곡하는 작태를 부렸던 것이다. 이것 뿐 만이 아니다. 

▲  압록수는 현 분하이다.  고죽성이 압록수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희한하게도 압록수를 현 분하로 비정하고 나니 신당서의 기록과 완전 일치한다.  고대인들은 황하를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죽성이 그 근거를 밝히는 열쇄이다.

▲고구려의 핵심강역은 산서성이고, 그 후방인 하북성, 내몽고, 동북삼성, 한반도까지 모조리 고구려의 초기강역이다. 중국 대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큰 강은 벼로 없다. 그 강이 현 분하로 원래 압록수인 것이다.

 

다음 주에 " (2부) 두 무덤(이제묘)이 밝혀준 고구려의 강역"이 연재됩니다.
 
[성훈 칼럼니스트는 지난 2008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이 넘도록 중국현지에서 역사탐방취재를 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행 강단사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우리 역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회수를 거듭할 수록 밝혀질 것입니다.  본지에서는 더욱 확실한 증거와 사료 및 자료를 발굴하고 찾기 위해 2차 역사탐방 기획취재 할 예정입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