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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대진

발해 지방정권 왜곡 중국…북한도 동북4성 노린다

by 고구리역사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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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 발해 지방정권 왜곡 중국…북한도 동북4성 노린다

스카이데일리, 중국은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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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봉했다는 교지가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라 부르면서 “고구려와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어불성설의 주장이다. 사서 곳곳에 “사신이 명을 전달하지 못했다(使命不達)”라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연호를 쓰는 황제국이 뭐가 아쉬워 당나라의 일개 제후 책봉을 받아들였겠느냐는 것이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왕들이 자체연호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독자적인 황제국이었다는 의미다. 상식적으로 대조영이 당나라의 ‘발해군왕 홀한주도독’ 책봉을 받아들여 당나라의 제후가 되었다면 후대 왕들은 자체연호가 아닌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다. 결국 발해가 자체연호를 썼다는 의미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이 그야말로 허구라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된다고 하겠다.
※<신당서>기록 원문에서 발해국왕의 휘(이름)와 연호와 시호 기록만 인용한다.
(번역) 당 현종 개원 7년(719년) 조영이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이라 했다. 아들 무예가 서서 동북지방의 모든 이족을 외신으로 하여 연호를 사사로이 인안이라 했고, 무예가 죽자 그 나라는 사사로이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아들 흠무가 서서 대흥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흠무가 죽자 사사로이 휘를 문왕이라 했다.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동생 원의가 섰으나 광폭하자 나라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굉림의 아들 화여를 추대하고 중흥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죽자 휘를 성왕이라 했다. 흠무의 작은 아들 숭린이 서서 연호를 정력으로 바꾸었고, 죽자 시호는 강왕이다. 아들 원유가 서서 영덕으로 연호를 바꾸었고, 죽자 시호는 정왕이다. 동생 언의가 서서 연호를 주작으로 바꾸었고, 죽자 시호는 희왕이다. 동생 명충이 서서 연호를 태시로 바꾸었고, 죽자 시호는 간왕이다. 종부 인수가 서서 연호를 건흥으로 바꾸었고, 죽자 시호는 선왕이다. 아들 신덕이 일찍 죽어 손자 이진이 서서 연호를 함화로 바꾸었고 죽자, 동생 건황이 섰고 죽자, 현석이 섰다.
(원문) 玄宗開元七年,祚榮死,其國私諡爲 高王。子武藝立,斥大土宇,東北諸夷畏臣之,私改年曰仁安。武藝死,其國私諡武王。子欽茂立,改年大興。欽茂死,私諡文王。子宏臨早死,族弟元義立一歲,猜虐,國人殺之。推宏臨子 華璵爲王,複還上京,改年中興。死, 諡曰成王。欽茂少子嵩鄰立,改年正曆,死,諡康王。子元瑜立,改年永德。死,諡定王。弟言義立,改年硃雀。死,諡僖王。弟明忠立,改年太始,死,諡簡王。從父仁秀立,改年建興,仁秀死,諡宣王。子新德蚤死,孫彝震立,改年鹹和。彝震死,弟虔晃立。死,玄錫立。
위 <신당서>에 있는 자체연호 사용기록은 유물로도 확실하게 입증된다.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에서 발견된 정혜공주 묘비와 198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발견된 정효공주 묘비명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문구가 있어 4대 문황제(대흠무)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음이 명확하게 입증됐다.
참고로 중국 동만주 길림성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은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대진국이 자체연호를 썼던 황제국이었다는 증거로는 잘 언급되지 않고, 사학계의 이론대로 발해의 영토가 동만주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물적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즉, 식민사학인 반도사관을 확정짓는 유물적 증거로 악용돼 버렸다.
또한 위 <신당서>의 자체연호 사용기록은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나와 있는 연호사용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래 도표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① <태백일사>에 기록된 ‘대진국’이라는 국호가 <신당서>에는 ‘발해’라고 기록돼 있다.
② <태백일사>에 대진국의 시조는 대중상이고, <신당서>는 대조영을 발해의 시조로 기록했다.
③ <태백일사>에는 15 황제를 전했다는 반면, <신당서>는 14 왕이라고 기록했다.
자체연호를 썼다면 황제국이기 때문에 <신당서>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또한 <중국백과사전>은 <신당서>를 인용해 “대조영은 스스로 그 성을 대씨라 했고, 측천무후가 그 아비를 진국공의 진국으로 봉했으며, 대외적 호칭은 대진국(大震國)이라 했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했는데, 이로써 발해국의 전신이 새로이 열린 것이다. 15세를 전하고 역년은 229년이다”라는 설명이 있어 국호는 대진국이고 15세를 전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조영의 부친인 대중상이 시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당서>와 정확히 일치하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자체연호 사용기록

중국이 자기네 사서기록에서 대중상을 지운 이유는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와 발해의 연관성을 고의로 없애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 30년 후 유민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북부여의 역사를 지움으로써 조선과 고구리의 연결을 끊으려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학계는 이렇듯 <신당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사학자들이 논문에 주로 인용하는 것이 <신당서>인데, <신당서>는 위서가 아니고 <환단고기>만 위서인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가짜로 만들어내는데, 왜 우리는 있는 진실된 기록도 위서라 하며 쓰레기통에 내버리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