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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인 위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기록이 있다.
<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조에 “정미 원년(B.C194) 번조선 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入于海)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위만이 공격하여 정권을 빼앗자 (기준은) 장수들과 그 좌우 궁인들과 海(해)로 가서 한의 땅(韓地)에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稱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고 기록돼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처음에 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은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海로 가서 마한을 공격해 깨고 자립해 한왕이 되었고 준 이후에 멸망해 마한인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는 기록이 있다.
▲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작았던 한나라 강역을 중국대륙 전역으로 확대시켰다(위 이미지). 중국이 그린 위만조선(아래 이미지 왼쪽) <이미지=필자제공>
요약 설명하자면 연나라에서 당시 국경인 패수(浿水)를 건너 번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준 왕의 정권을 탈취하자, 위만에게 패한 기준은 추종자들과 함께 해(海)로 들어가 한(韓)의 땅으로 가서 韓(한)을 세우고 스스로 韓王(한왕)이 된다. 여기서의 패수를 북한의 청천강으로 인식하다보니, 海를 황해 바다로 해석하고 한의 땅을 한반도 남부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국사교과서에 삼한이 남한 땅에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 중국에 있는 패수를 잘못 설정하면 황하 북부에 있던 삼한이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다. <이미지=필자제공>
이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이 백제로 발전하고, 진한(辰韓)이 신라로 발전하고, 변한(弁韓)이 가야로 발전한다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논리다. 그러나 기록의 ‘走入海’와 ‘入于海’라는 문구로 보아, 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라는 지역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해주(海州), 해성(海城) 등과 같은 곳이다. 황해 바다로 들어가면 익사(溺死) 밖에 더 하겠는가!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 38년(B.C20) 2월 기록에 서라벌의 사자가 마한을 예방하니 그 왕이 꾸짖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진나라는 함양을 도읍으로 하여 섬서성과 하남성까지만 지배했던 나라인데 그런 나라의 백성들이 어찌 한반도 남부까지 건너올 수 있으리오!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도망간 곳이 바로 상당(上黨)으로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장치시의 장자현 일대다. 조선왕조 때 청주 한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한명회(韓明澮)의 군호가 상당군이었고, 현재 청주시에는 대한민국 청주 한씨의 본향인 상당구라는 지명도 있다. 물론 그곳은 한씨로 성을 바꾼 기준이 자리 잡았던 산서성 상당에서 가져다 심은 지명이다.
▲ 기준의 정착지인 산서성 동남부 상당은 본래 청주 한씨의 본향. <이미지=필자제공>
이후 위만은 당시 번조선의 상국이었던 북부여와 적대관계가 되어 독자정권이 된다.
<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조에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위만의 도적떼에 대비케 하였다. 이에 위만도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3세 고해사 단군조에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녀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위만을 도적으로 규정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중략)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과 제 땅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략) 요동태수는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위만은) 국경 밖 만이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만이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니 천자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고 기록했듯이 위만은 친조선(북부여)이라기보다는 친중국(한나라) 독자정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만을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세워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의 사학계를 대표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피에서 위만조선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를 읽노라면 마치 중국인 위만의 대변인 같은 기술이라 아니할 수 없어, 차라리 ‘중국역사재단’으로 간판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용-시작)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포함시켰으나,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이외에 ‘위만조선’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중략) 연나라 출신의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지배층 일부가 교체되었음을 의미할 뿐, 국가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위만의 왕위 찬탈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정권의 고위직에 조선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만조선 역시 고조선의 일부에 포함되어야 한다.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 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끝)
▲ 이미지=필자제공
이렇듯 대한민국 식민사학계가 위만조선을 찬양하는 이유는, 일제가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배를 위해 단군을 신화화하고 조선의 역사를 말살하면서 이민족이 식민지배했던 역사를 확대·해석하면서부터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는 이민족이 지배했던 위만조선과 한사군으로부터 시작하는 식민지배(노예)의 역사이므로, 지금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말살된 식민지배의 역사가 광복 68주년이 지나도록 안 바뀌는 이유는, 일제치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수하가 되어 우리역사를 도살하던 이병도의 후학들이 현재 강단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가 만들어준 거짓의 역사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국민들을 우민(愚民)으로 만들고 민족혼을 말살하고 있는 중이다.
식민사학계는 <환단고기 북부여기>가 번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도적으로 규정한 위만을 ‘위만조선’이라 일컬으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라고 하고 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조작한 위만조선과 한사군 역사의 허구가 공론화되고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이 나라의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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