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9/04/30 [13:36]
본 글은 아래 5부작의 제 (4부)입니다.
(1부)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부) 역사동호인들의 이상한 요동.요서 이론
(3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4부)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5부)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인가?
백이.숙제 무덤의 발견으로 요서군의 위치가 산서성 영제시 일대로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서 그 동쪽에 있는 요동군의 위치도 밝혀질 수 있다. 위 한서지리지에서 언급된 대요수, 안시, 요양, 서안평 등이 있는 요동군은 임분시의 동부 평지인 임분분지(臨汾盆地) 일대로 볼 수 있다. 이 요동군 안에 고구려의 도읍들이 위치하고 있어 한족들은 고구려를 부를 때 요동이라 부른 것이다.
요서 10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요서군의 위치가 확실히 밝혀짐으로서 태조대왕이 쌓은 요서 10성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한단고기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 요택은 현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지명 황하습지로 황하와 심수 사이의 습지이다.
여기서 그 기준이 되는 지명인 안시의 위치 근거는 바로 (1부)에서 언급한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들 수 있다. 이 외 여러 근거가 있으나 나중에 안시성을 다룰 때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신당서 동이열전)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여기서의 마자수는 압록수로 당나라에서는 당취수(唐就水) 또는 요동군의 대요수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로 길이는 730KM인데 이는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2,100리와 거의 일치한다. 고대 압록수의 흐름(서류)과 길이가 현 압록강과 비슷하다 보니 중국과 일제가 강 이름을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지도에 비정하고 보면 현 분하의 남북 흐름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산서성 남부를 동서로 갈라 중심에서 서쪽의 평지를 요서군, 동쪽의 평지를 요동군이라고 했다. 즉 서쪽인 영제시 일대의 평지를 요서군, 요서군의 동북쪽 임분분지와 현 운성시의 동부를 통털어 요동군이라 한 것이다.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환도산성은 어디인가?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번한의 옛 도읍은 개평부 동북 70리”라 기록되어 있어 번조선의 도읍이 안시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안시는 곧 환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산삼왕 13년(209년)에 환도산성으로 천도했으나 동천왕 20년(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성이 파괴되어 다시 국내성으로 옮겨서 96년간 머물다가 고국원왕 12년(34)에 환도산성을 수리하고 옮겼으나, 같은 해 10월 모용황의 침략으로 환도산성이 함락되고 파괴되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되자 고국원왕은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간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환도성을 집안(국내성) 근처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위의 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환도는 안시와 거의 붙어 있어야 맞는데, 안시는 요하 강변에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환도성이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이란 말인가? 사서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지명비정이 조작된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과 일제는 역사의 지명조작을 위해 관구검기공비를 옮겨 놓는다. 원래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관구검기공비와 환도산성이 지명 조작되어 길림성 집안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인데, 그걸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 하겠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서 10성이 예전에 요수로 불렸던 난하 서쪽이라고 주장학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고구려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이 진황도시 청룡현에 있는 도산(都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도 상으로 보니 요수(난하) 근처에 있는 비슷한 지명이라는 이유로 보이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하겠다.
진황도시 청룡현 도산에 가 보면 그곳은 고구려의 도읍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도읍이 되기에는 협소한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산까지 오르는 길도 굉장히 좁다. 과연 대제국 고구려가 그런 곳에 도읍을 정했겠는가? 앞으론 가 보고 그런 주장을 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환도산성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진짜 환도산성은 산서성 화염산 남단 안시성과 같은 산 속에 있는 현 지명 관왕묘(關王廟)이다. 안시성이 있는 화염산 남단의 산은 말 모양을 하고 있다. 안시성은 말머리처럼 생긴 산(馬首山)에 있으며, 환도산성은 말꼬리(馬尾山)처럼 생긴 산 속 정상에 있다. 즉 화염산 남단에 있는 산의 좌측에 안시성이 있으며 우측 안쪽 정상에 환도산성이 있다.
필자는 환도산성이 있던 이 말꼬리산(중국발음 마이산)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마니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단군조선의 왕검성인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임분시로 확실시되며 그 근처에 마이산이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필자의 생각이 거의 맞으리라 본다.
이 환도산성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산 속으로 들어가 아주 가파른 산을 꼬불꼬불 올라야 한다. 산 속 길을 따라가면 도처에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곳이 나타난다. 그래서 외곽 좌측에 있는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산 속에 있는 환도산성을 공격할 수 없는 지리적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산 정상에 올라가면 그 근처에 있는 산들의 정상이 모두 평탄한 평지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 산 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을 받지 않아도 자체 농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그래서 안시성이 당태종에게 그토록 장기간 포위된 상태에서도 고구려의 10만 병력이 버틴 것은 이곳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다.
환도산성에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임분시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당태종의 요동정벌 때 안시성전투에서 이도종이 말하길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서 왕사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병졸 오천명을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무리와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성립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전 병력이 모두 안시성에 주력하고 있을 때 수도인 평양성을 습격하자는 이도종의 작전 건의인데, 이러한 작전은 안시성과 평양성이 가깝지 않고는 성립될 수가 없다. 이러한 이도종의 습격작전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요녕성 요하변에 있는 안시성과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과 대동강 평양성 사이에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거리적인 문제가 있다.
그 유명한 요동성은 어디인가?
그리고 수양제와 당태종이 하남성 낙양의 북(北)에서 요수(遼水)와 요택(遼澤)을 지나 고구려와 처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평지에 있는 요동성이다. 요동성은 당태종/수양제가 요수와 요택을 지나면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이 요동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산서성 운성시의 동부와 진성시 사이에 있는 왕옥산 주변으로 추정된다.
<한단고기>에서는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이 요동성의 위치를 창려에 있다고 했다. 조작된 중국 지도로만 역사 지명을 비정하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이 창려를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로 비정하고 있으나, 원래 창려는 하북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서성 최남부에 있었다.
갈석산과 창려와 난하와 노룡이라는 지명은 항상 같이 따라다녀야 한다. 대갈석산이 있는 우북평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의 남쪽으로 볼 수 있다. 난하는 지금의 속수로 비정되고, 노룡은 이미 백이.숙제의 묘와 고죽성(포주고성)의 발견으로 그 일대가 노령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창려도 그 근처가 아니겠는가?
<한서무제기주 漢書武帝紀注》에는 “文穎曰,碣石在遼西壘縣”라는 기록이 있어 갈석산이 요서군의 루현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래는 한서지리지에서 우북평군을 설명하는 문구이다. 요서군과 우북평군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右北平郡) 秦置。莽曰北顺。属幽州。户六万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万七百八十。县十六:平刚,无终,故无终子国。浭水西至雍奴入海,过郡二,行六百五十里。石成,延陵,莽曰铺武。俊靡,氵垒水南至无终东入庚。莽曰俊麻。薋,都尉治。莽曰裒睦。徐无,莽曰北顺亭。字,榆水出东。土根,白狼,莽曰伏狄。夕阳,有铁官。莽曰夕阴。昌城,莽曰淑武。骊成,大揭石山在县西南。(대갈석산이 현 서남에 있다) 莽曰揭石。广成,莽曰平虏。聚阳,莽曰笃睦。平明。莽曰平阳。
중국과 일제가 우리역사를 말살한 이유는?
필자는 6개월 전 산서성 남부를 역사탐방하고 왔다. 가서 보니 고구려의 역사적 지명이 모두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탐방 중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여기(산서성 남부)까지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면서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했고 중국도 거기에 동조해 지명 조작을 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현장인 산서성 남부를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역사싸이트에서 얻은 잘못된 지명으로 함부로 우리 역사 지명을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역사를 만주와 한반도에 국한하려는 식민사학계와 북경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역사네티즌들은 반드시 산서성 남부에 가봐야 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론과 논리가 맞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이론이야 이미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북성 북부가 고구려의 핵심 강역이라고 말하는 모 역사 싸이트가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은 그곳에 게시된 지명비정이 다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도사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하북성 북부로 끌고 나왔다고 해서 대수가 아니다. 지명에 따른 역사적 사실의 톱니바퀴를 제대로 맞추어야 진정한 민족사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네티즌들이 중국어를 읽지 못하고 중국 인터넷에서 지명을 자유자재로 검색하지 못하다 보니 중국에서 이미 지명조작한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지명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죽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으로,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조상의 혼과 민족정신이 담긴 우리 역사를 중국이 역사왜곡을 한 뒤에 만들어진 지도로만 비정하여 역사의 혼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곧 (5부)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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